남석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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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63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06년 3월 청송 주왕사에서 50여 동지를 모아 산남의진에 들어가니 이 진은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들은 시종경 정연직선생의 뜻으로 기자 연기 장군이 영천고을에서 영남의병을 연합한 수천대군의 본영이다.
타고난 절색의 기백은 나라사랑의 불꽃이 되어 의여가 출중하자 각읍을 점거한 왜적을 향해 노도와 같이 동해안 천리를 치달리면서 비호처럼 적도를 휘몰아치니 가는곳 마다 그들의 소굴은 무너지고 승전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기둥 하나로 바치기엔 큰 집이 너무 기울었다. 1907년 7월 19일 청하군 옥계 접전에서 총상을 입고 잡히었으니 나라의 간성이 무너졌다. 왜법정에서 효유하는 적을 통매하며 대한장부의 열을 남기고 1907년 9월 15일 30세를 일기로 대구옥에서 순국하니 아! 호국의 거성은 사라졌다. 온 겨레의 슬픔이 사무쳐 하늘은 빛을 잃고 산과 물도 노여워서 울부짖었다.
배 월성박주익의 따님은 왜적에 쫒기면서 손수 부군을 이곳에 봉장하고 망명의 한난길에 가시어 희리골에 고이모셨다. 슬하 위록, 점용 두 아들도 어버이가시고 나라 망하자 격랑속에 조졸했으나 위록후에 길랑, 잠용후에 상광, 상만, 영길, 상활, 상홍및 녀 백태출은 모두 광복한 새 조국에 살아 상광의 자 지환등 증손도 많으나 유로 약한다.
가신지 일흔한돌 1977년 12월 13일 건국훈장 국민장 제537호가 추서되었다.
국보의 황망에 송강의 의열이여
여명의 ㅁ두에 예양의 청풍이여
국구의 등하에 살신의 충절이여
조국의 내백에 성인의 사표인저
이 붉은집 뒤편에 있는 산 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붉은 지붕이 있는 집의 뒤쪽을 한참 이리저리 찾은 후에, 집 뒤쪽으로 50미터 이상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이곳저곳을 한참 헤맨 후에 높은 축대를 발견했다. 이곳이라는 느낌이 왔다.
愛國志士 松岡 南公 錫仁 之墓(애국지사 송강 남공 석인 지묘)
愛國志士 松岡 南公 錫仁 之墓(애국지사 송강 남공 석인 지묘)
여기 배달의 얼을 빛낸 선열이 계시니 구한말 왜적이 이땅을 침노할때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어 겨레의 길을 밝히고 뜨거운 피를 바쳐 이 강토를 지키신 분이다.
1878년 도평에서 나시니 휘는 석인이요 자는 우팔이며 호는 송강이다. 영양남씨니 중조는 고려 찬성사 홍보요 경재 천주의 8세손이며 이고을 세족인 운하의 자이다.
의롭고 슬기로운 내림을 이어 방년 18세에 이미 청송의진의 소모장이 되었더니 나라의 만류로 군사를 흩었다. 다시 책일고 밭갈기 10년 안으로 나라는 더욱 병들고 밖으로 왜적은 주권을 빼앗으니 다시 구국의 길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