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 363-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 352-1 청송옹기 체험장 옆 의사 내산 이현규(이하현) 선생 기념비가 서 있던 곳
도로 맞은편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 363-2에 이현규 선생 기념비가 옮겨졌고, 항일의병 오누이지 전적기념비도 추가 건립되었다.
안내판은 오래 전의 그 안내판이 그대로 옮겨져있다. 의사 내산 이하현 선생 기념비
의사 내산 이하현선생 기념비
이곳에 세워진 기념비는 1905년 일본에 국권이 찬탈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동지 500여명 규합하여 안동.청송.영양.진보 4개군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일군과 많은 격전을 하던 중 이곳 오누지에서 의병소탕부대인 무등오장 부대와 격전하여 무등등 십여명을 사살한 전승지이다. 선생은 1874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출생하여 1917년 총상의 여독으로 순국하셨다. 이에 이곳 전승지에 국가와 국민의 성금으로 경북순국선열 유족회와 내산 이하현선생 기념비 설립위원회가 1968년 11월 28일 기념비를 세우다. 1968년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곳에 세워진 기념비는 1905년 일본에 국권이 찬탈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동지 500여명 규합하여 안동.청송.영양.진보 4개군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일군과 많은 격전을 하던 중 이곳 오누지에서 의병소탕부대인 무등오장 부대와 격전하여 무등등 십여명을 사살한 전승지이다. 선생은 1874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출생하여 1917년 총상의 여독으로 순국하셨다. 이에 이곳 전승지에 국가와 국민의 성금으로 경북순국선열 유족회와 내산 이하현선생 기념비 설립위원회가 1968년 11월 28일 기념비를 세우다. 1968년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義士 奈山 李夏玄 先生 紀念碑(의사 내산 이하현 선생 기념비)
義士 奈山 李夏玄 先生 紀念碑(의사 내산 이하현 선생 기념비)
여기 한 선비의 몸으로 조국의 주권이 외적에게 빼앗길때 책상을 치며 울부짖다가 분연히 칼을 집고 이러나 적을 무찌른 의사 한 분이 계시다. 1905년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우리의 주권이 왜적에게 넘겨지자 동지 수십인과 청송 주왕사에 모여 거의 토적할 것을 모의하고 그래 12월 울진, 불영사에서 강원, 경상 양도의 동지들이 모인 가운데 안동, 청송, 진보, 영양등 4군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각지에 격문을 날리고 의병을 모집하니 500명이 넘었다. 주왕산과 청량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이듬해 2월 영양군 입암면 교동에서 각서를 정하니 중군장에 유시연, 고모장에 신형일, 도포장에 김대규, 도포수에 권애성, 집사에 조완이 등이었다. 친히 병단을
이끌고 각지의 적을 소탕하다가 그해 4월 왜의 헌병오장 무토(武藤)부대와 직보 장수령에서 교전한지 수십회 드디어 이곳 오누지 전투에서 동군 읍천면 어천까지 추격하면서 무토 등 십여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불행히 조집사는 전사하고 의사는 심한 총상을 입었으나 남은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그해 5월 울진, 죽변, 왜관을 격파하고 또 영북을 무찌르다가 적의 대공격을 받아 김도포장등 많은 병력을 잃게되자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재기를 약속하면서 의진을 해산하였다. 그때 왜적은 의사를 잡다못해 상금과 높은 벼슬을 줄것이니 자수하라고 방을 붙였다. 이때 한 동지가 상처를 염려하여 자수를 권하자 의사는 크게 꾸지시기를 차라리 제의 전횡과 같이 의로운 죽음이 있을지언정 어찌 한의 형률과 같이 더러운 삶을 찾겠는가 하고 자취를 감추어 영일군 청하면 연상피지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글방 훈장 노릇을 하였으나 실은 구국의 역군을 기르면서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것이다. 그러나 1919년 2월 3일 재기의 웅도를 이루지 못하고 천추의 한을 품은채 총상의 여독으로 영면하시니 향년이 44였다. 의사는 1874년 11월 16일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서 석계선생 이시명의 10대손으로 탄생하니 본관은 의령이오 그 빛나는 이름은 현규요 자는 하현이라. 우해와 내산은 그의 호다. 당시 의병 김완이에 대한 1909년 6월 9일 대구지방재판소의 소위 판결문에는 폭도괴수 이하현이라 하였고 오누지상 이 자리에 세웠던 적추 무토의 순직비에는 비적괴수 이하현이라 한것으로 보아 의거 당시에는 자를 썼던 것 같다. 이제 그 처럼 애써 찾으려던 조국의 주권이 회복된지 20년 정부에서는 빛나는 건국공로장이 내리고 동포들은 정성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서 거룩하신 업적을
길이 전하고 높으신 뜻을 널리 받들고자 글을 청하므로 붓을 간추려 대강 그날의 사적을 적고 다시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를 새기노니
사직이 무너질때 붓 던지고 일어서서 500명 의병들을 한칼로 휘몰더니 오누지 이 못 위에 적추를 무찔렀네. 흉탄에 흘리신 피 이땅에 고여있고 의로우신 그 정신은 가슴마다 뛰는구나. 거룩하신 임의 자취 조각돌에 다 새기랴 두어라. 이 겨레 자자손손 입마다 비 되리라.
사직이 무너질때 붓 던지고 일어서서 500명 의병들을 한칼로 휘몰더니 오누지 이 못 위에 적추를 무찔렀네. 흉탄에 흘리신 피 이땅에 고여있고 의로우신 그 정신은 가슴마다 뛰는구나. 거룩하신 임의 자취 조각돌에 다 새기랴 두어라. 이 겨레 자자손손 입마다 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