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 503-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장 백운 조공 성길 유적기념사업회 건립
"거증문헌과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밝혀주신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경북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 503-1 안덕초등학교 내 청송의병 전적 기념비를 찾아왔다.
운동장 바로 옆 산기슭에 비석이 서 있었다.
청송의병전적기념비. 뒷부분을 보니 1962년 6월 11일에 건립한 것이다.
우리 민족사를 회고하면 겨레가 외침을 받아 누란의 위기에 있을때 분연이 일어서서 이 강토를 지키고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선양한 것을 집권세도가가 아니라 도리어 의롭고 용기있는 백의민중이었다. 가까운 사례로 임진왜란 당시나 한말의 창의가 그러했다. 한말에 이나라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을때 조적의 역신들은 외세를 업고 권세유지에만 급급하자 삼천리방방곡곡에서 의롭고 용기있는 지사들은 외국침략의 격퇴와 폐정혁파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도탄에 빠진 민중과 더불어 궐기하니 각처에 의기가 구름처럼 나부꼈다.
1896년 병신 정월 16일 이곳 청송에서도 조성길이 격문을 띄어 향유와 유명무명의 의사 200여인이 참집하여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창의하였다.
설단입기한 후 수삭에 대구에서 공격해온 적병을 격퇴하고자 행군중 신성에서 분진 심대장은 향근곡하고 조성길을 각군 도지휘로 정진수 장한탁 김진방 장한두 남석우 조성일 남석술 조찬규 남석인외 다수장병이 이곳 안덕후산에 유진하니 4월 상순일이었다. 감은후산에 포진한 적병을 의군은 옥현에서 공격하니 종일토록 일진일퇴의 격전이 전개되었다. 세불리한 적병이 전화로 불타는 감은의 잔여민가에 방화하여 한 마을 백여호가 소진되었고 파아의 사상자도 무수하였다. 이때 왜추는 "임진시에도 청송은 불가침이라 하더니 과연 난공불락의 곳이다."하고 야반에 의성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서전에 대승한 청송의병은 사기충천하여 조성길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덕으로 출병하여 흥해입성 합진하니 대구와 경주의 적병이 합세하여 맹공하므로 격전끝에 철군하니 타군 산병 수백명이 청송의병과 생사혈맹하고 청송으로 회군하였다. 기후 선유사 조유승의 자중 권유에도 불응하고 이천진이 화장에서 위급하므로 원군차 행군하다가 마평 동방에서 백병전을 전개하였으나 세궁력진하여 패하고 산병을
설단입기한 후 수삭에 대구에서 공격해온 적병을 격퇴하고자 행군중 신성에서 분진 심대장은 향근곡하고 조성길을 각군 도지휘로 정진수 장한탁 김진방 장한두 남석우 조성일 남석술 조찬규 남석인외 다수장병이 이곳 안덕후산에 유진하니 4월 상순일이었다. 감은후산에 포진한 적병을 의군은 옥현에서 공격하니 종일토록 일진일퇴의 격전이 전개되었다. 세불리한 적병이 전화로 불타는 감은의 잔여민가에 방화하여 한 마을 백여호가 소진되었고 파아의 사상자도 무수하였다. 이때 왜추는 "임진시에도 청송은 불가침이라 하더니 과연 난공불락의 곳이다."하고 야반에 의성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서전에 대승한 청송의병은 사기충천하여 조성길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덕으로 출병하여 흥해입성 합진하니 대구와 경주의 적병이 합세하여 맹공하므로 격전끝에 철군하니 타군 산병 수백명이 청송의병과 생사혈맹하고 청송으로 회군하였다. 기후 선유사 조유승의 자중 권유에도 불응하고 이천진이 화장에서 위급하므로 원군차 행군하다가 마평 동방에서 백병전을 전개하였으나 세궁력진하여 패하고 산병을
규합하여 경주 인부에 이르러 다시 적의 대군과 대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선열들의 의롭게 뿌려진 피는 거룩한 의기로 살아 움터서 우리의 혈맥속에 약동하고 자주민족의 자유 평화의 정당한 삶을 이 터전위에 영원히 보장할 것이다.
1962년 6월 11일
1962년 6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