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병용사 충혼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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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 313-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
무명의병용사 충혼탑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경북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 313-1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을 찾았다.
의병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화전등 항일의병 기념공원 - 이곳은! 대한민국의 독립 유공자로서 서훈이 추서된 전국의 의병 선열 모두의 위패가 모셔진 충의사가 있으며, 훈격이 기록된 명각대와 이름 없이 희생된 전국 무명 의병 용사의 우국충혼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탑이 자리하고 있는 전국 유일의 항일의병 기념공원(현충시설 제31-1-69)이다.

의병이란? -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뜻있는 백성들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라의 부름이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무장을 갖추고 군사 대열을 이루어 외적에 맞서 목숨 바쳐 싸웠던 민병을 의병이라 한다.
의병의 역사와 항일 의병사 -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국가 부흥을 위한 의병투쟁에서 항일의병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의병항쟁이 있었다. 우리 민족사를 회고하면 겨레가 외침을 받아 위치게 처했을 때 분연히 나라를 지키고 우리 민족 주체성을 선양한 것은 집권세력이 아니라 의롭고 용기 있는 백의민중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외침에 대항하여 목숨 바쳐 싸웠던 의병이 있었다. 의병은 근본정신은 겨레가 외침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굳은 의지이다. 그 정신을 거슬러 올라가면 몽고가 침임했을 때 목숨을 바쳐 대항했던 삼별초항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시기의 의병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민족 자존을 위한 항쟁으로 1910년 국권 피탈 전후의 의병전쟁에 영향을 준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의병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 난의 의병활동과 한말의 을미사변 이후 한일 강제 병합 전후의 의병활동이며, 1895년 10월의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하여 개항 이후 축적되어온 반일감정이 반일 의병투쟁으로 바뀌면서 1910년 국권 피탈 전후의 의병항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항일의병 투쟁 현황 ]
전기의병(1895~1896) 을미사변, 단발령 : 동학 농민군 잔여 세력 가담
중기의병(1905~1907) 을사늑약 체결 : 평민 의병장 출현과 활동
후기의병(1907~1910) 고종 퇴위, 대한제국 군대해산 : 해산군인 합류 -> 의병전쟁
독립운동기(1910~1919) 일제 국권침탈 : 국내외에서 일제 항거
경북의 항일의병사 -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곳이자,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온 곳이다. 그 실마리를 연 것이 바로 경북 안동에서 일어난 1894년 갑오의병이며, 이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첫걸음이었다. 또한, 민초들이 주도세력으로 급성장한 곳 또한 경북이다. 의병항쟁은 넓은 범위에서 문화권별로 전개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북서부지역의 문경.상주, 북부지역의 안동.예안.예천.봉화.영주.의성.청송.영양, 동해한의 영해.영덕, 서부지역의 김천.선산, 남동부의 영천.경주.포항 등 여러 지역에서 항쟁이 펼쳐졌다. 북서부지역에서는 이강년, 북부지역에서는 권세연.김홍락.김도화.이만도.김도현.금석주.박주상.장윤덕.김상종.심성지, 동해안에서는 신돌석, 서부지역의 허위, 남동부지역의 정환직.정용기 부자와 최세윤 등의 활약이 있었다. 나라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총칼 아페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신 수많은 의병유공자가 있으나, 경북 지역의 대표적 의병장 활약상을 나열하면, 왕선 허위 선생은 1896년 3월 김산(김천)에서 의병을 규합 성주, 충청도 진천 등지에서 활동 중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을 자진 해산 후 청송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1907년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양주,철원,장단,영천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해산당한 강화진의 관군까지 흡수하였고, 전국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을 결성하였으며, 운강 이강년 선생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1896년 문경에서 의진을 결성하여, 이후 충북 제천의 호좌의진에 합류하여 유격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싿. 1907년 7월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수많은 전투를 펼쳤다. 평민 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세력을 구축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나이로 1896년 3월 13일 영해에서 10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특히,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에는 해산 군대까지 휘하에 들어와 막강한 병력으로 경북 북동부 지역에서 일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청송의 항일의병사 - 청송은 전국에서 의병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의병사에 있어서 정신적인 선각자들의 연고지다. 퇴계 이황 선생과 학복 김성일 선생의 우국충절의 선비정신이 의병정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퇴계 선생의 본향이 처송의 진보이고, 의병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임란 초에 퇴계, 남명 두 선생의 후학을 의병으로 동원하여 진주성을 사수한 학봉 김성일 선생의 태지향이 청송의 안덕이요, 의병승장이었던 사명대사 또한 주왕산 대전사에서 의병을 훈련하였다. 청송의병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구한말 의병 활동으로 나눌 수 있으나, 1996년 청송의진 심성지 의병대장의 문적 정리 중 발견된 적원일기의 발굴로 구한말 의병활동이 크게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청송의병의 대표적인 전투는 1896년 감은리전투, 화전동전투, 1906년 오누이지전투, 1910년 고와실전투가 있다.

오누이지전투(1906년 4월), 고와실전투(1910년), 감은리전투(1896년 5월 14일), 화전등전투(1896년 7월 하순)
적원일기 - 1896년 청송의진의 활동을 자체적으로 기록한 일기식의 진중 기록물로서 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 2일(음력 1월 19일)부터 의진이 분진하면서 본진의 활동이 종료되는 5월 25일(음력 4월 13일)까지 85일간에 걸친 기록이다. 기록자는 김승진, 심의식, 오세로, 서효격 등 적어도 4인 이상으로 추정된다. 「적원일기」라고 한 까닭은 창의를 한 해가 1896년 병신년으로 병신년의 병은 색으로는 붉은색을 뜻하고 신은 원숭이를 뜻하니 곧 병신년 일기와 같은 말인데 '적원일기'로 명명한 것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면서 혹 이 일기가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비어를 쓴 것으로 추측된다.

구한말 의병활동 - 1895년 10월의 일본에 의한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하여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창의하였으며 청송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1896년 청송의진, 진보의진, 산남의진이 청송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청송의진은 참여 인원의 면모나 전력, 활동면에서 볼 때, 한말 청송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진이다. 1896년 3월 12일(음력 1월 29일) 결성되어 16일에 창의를 천명하였다. 청송의진이 창의 시 표방한 두 가지 목표는 국권수호의 위국거의와 향촌사회 보호의 자수지계였다. 청송의진은 창의 후 주변의 안동.진보.선성.영양.의성.영덕의진 그리고 경기도에서 남하한 김하락의 이천의진 등과 긴밀한 협조하에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혹은 연합부대를 편성해 활동하였다. 그 결과 5월 14일 감은리전투, 6월 17일의 경주성전투, 7월 11일의 영덕전투, 7월 하순의 화전등전투 등 청송의진이 수행한 대표적인 전투들은 모두 다른 지역 의진들과 유기적인 관계하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해 이루어졌다.
진보의진은 청송의진과 더불어 전기 의병 시기에 청송군 관내에서 활동했던 부대로, 왕산 허위 선생의 맏형 방산 허훈이 1896년 4월 7일(음력 2월 25일)경 편성한 부대였다. 창의 후 어천,남면 화마리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청송,영양,의성 등 주변 의진과 정보를 교환하며 협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5월 14일 감은리전투 후 청송.영양의진과 합세하여 의성의진을 응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안동의진의 배후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 명륜당 - 청송의진이 거병을 도모한 회의 장소
산남의진은 후기의병 시기에 청송지역의 의병전쟁을 선도한 부대이며, 인근 영천에서 편성되었다. 1906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청송을 비롯하여 영천, 영일 일대에서 정환직, 정용기, 최세윤 의병장이 이끌었던 부대이다.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