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집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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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구천리 911-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아! 무너지는 큰 집을 나무 하나로는 괼 수 없거늘 더우기 기울어가는 국세를 한 선비의 힘으로 부지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옛부터 충신의사가 국난을 당해 성패이둔을 도외시하고 홀로 적과 대항하여 싸우고 무찔러서 생사를 오직 의에 따를 뿐이니 국맥이 이로인해 이어지고 강상이 이에 힘입어 유지되는 것이다. 사천년의 민족사를 빛내는 수 많은 선열들의 의적이 모두 그것이다. 불행이도 장지를 이루지 못하고 죽음마져 떄를 잃어 곧은 마음 일념으로 쓸쓸하게 생을 마친 분이 또 몇이던고. 고 산남의진 선봉장 배공이 곧 그 분이다. 공 휘는 연집이요, 자는 원서며 본관은 흥해니 선조때 명신관찰사 임연재 선생 휘 삼익의 11대손이다. 고의 휘는 선화요, 비는 남원양씨니 1878년 고종 무인 5월 5일에 청송군 남안 평리에서 출생하다. 용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호만하여 어려서부터 항상 대장으로 자임하여 전진
놀이를 즐기며 총과 활을 만들어 무예를 익히기를 좋아했다. 성장함에 따라 용력이 뛰어나서 비호장군의 칭호를 받았고 활과 총은 백발백중의 묘기를 터득했다. 1904년 전화과에 출사하여 판임관이 되고 동년 8월에 통훈대부 의금부도사에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을사협약이 체결됨을 보고 공이 분한을 이지지 못하여 대장부가 국가위망에 처하여 어찌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리오. 오직 원수를 처부시어 국은에 보답할 뿐이다. 곧 동지를 규합하여 거의를 꾀하던 중 마침 동광 정환직 선생이 고종제의 밀칙을 받들어 영남에서 기의하게 되자 남석우 남석인 이인기 등 제공과 함께 용○ 참가하여 단오공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산남의진을 결성하였으나 병기의 부족함을 통탄한 공은 탄환의 제조공급을 친히 담당하여 험한 산길과 범람하는 홍수를 몇차례나 건너 보급에 전력하고 이어서 선봉장으로 팔공선현 대사산 등지에 전전하여 임기응변의 기습으로 수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개미때처럼 몰려드는 적세는 날로 성해갈 뿐 마침내 1907년 가을 단오공이 전몰하고 동광 선생이 대장에 취임하자 공이 주야로 장영을 보위하여 기무에 참여하였고 선생께서 또 순절하심에 항전지구를 분담하여 공은 청송을 담당하였다. 1910년 마침내 종사가 구허되니 풍찬노숙의 기구한 신세마저 발붙일 곳 없으나 남은 장정을 격려하는 한편 신돌석 부대와도 연결하여 퇴세만회에 힘쓰다가 고와곡 싸음에 적의 추격을 받아 경주 김씨댁 내실에 잠입하였는데 유여사의 기지로 벽장에 숨게 되고 뒤따라온 적을 감쪽같이 속여 위기를 면하게 되자 여사의 높은 의협심에 깊이 감사하여 의남매를 맺어 평생을 존경했다. 이에 뒷산으로 탈출하여 적 45명을 사살했으나 공 또한 중상을 입어 산곡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혹독한 형초로 병발의 몸되어 더욱 울분을 못이겨 일절의 세념을 끊고 초야에 숨어 말없는 항쟁을 계속하던 중 마침내 광복의 날을 맞았으나 뒤따라 일어난 6.25의 참극에 새로운 비분을 품은채 1952년 정월 13일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시다. 그 후 28년 기미에 공의 아들 심직이 기념비를 새우기 위해 나에게 비명을 청하니 공의 높
은 의기를 흠모한 나머지 즐겨 붓을 들어 위와같이 서술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나라 위해 바친 목숨 죽음을 각오한 바 붉은피 가슴 속 치솟고 의기 산남에 떨처 원수를 무찌르며 종횡무진 싸웠으나 국운이 이미 다하고 충성 어디다 바치련고 지친 몸이나마 마음만은 매워서 지켜온 70년 고절 아! 돌이여 넋이 있거든 대신하여 말해다오.
공의 자 심직 손 병철 천섭 만섭 호섭 운학 원학 증손 대적 대준 재태 은규 재복 재규 진성 재국 희성 철형 재준 영춘 성윤 산남의진 성봉장 배공연집 유공비 건립추진원장 안성학
청송군 부남면 구천리 911-3 애국지사 산남의진 선봉장 배연집 의사 기념비를 찾아왔다.
구천리 등골 장터 안마 병암
보훈처 공훈록에는 배연즙(裵淵楫)으로 되어있다.
배연집 의사 기념비
이 기념비는 애국지사 배연집(1878~1953)선생의 독립운동과 구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81년에 세워졌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국궈침탈이 본격화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1906년 3월 경북 영천에서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이 결성되자, 선생은 여기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우선 박태종과 함께 의서일대에서 포구와 민병들을 모집하여 의병진용을 갖추고, 선봉장을 맡았다. 1906년 5월에는 신돌석의진과 연합하여 영해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그 뒤 청하로 진격하던 중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라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2016년에는 이 기념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通訓大夫 兼 義禁府都事 山南義陣 先鋒將 裵公 淵集 紀念碑
(통훈대부 겸 의금부도사 산남의진 선봉장 배공 연집 기념비)
通訓大夫 兼 義禁府都事 山南義陣 先鋒將 裵公 淵集 紀念碑
(통훈대부 겸 의금부도사 산남의진 선봉장 배공 연집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