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길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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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28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상길이요 자는 경림이며 약우당은 그의 호이니 해평김씨이다. 고려 개국벽상공신이 고문하시중해평군시장렬공 휘 훤술이 그 조상이다. 영남사림이 형성될 때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인인지지당 김맹성 선생이 그의 15대조이며 성균생 원인휘 석겸 자 백붕호 몽암공이 6대조이며 청송현의 입향조이기도 하다. 고조는 휘 구운이며 증조는 휘 우곤이고 조부는 휘 진동이요 고의 휘는 광호이며 비는 안동김씨이니 후덕하여 돈목했다. 슬하에 3남4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휘 영환이요 둘째는 휘 운환으로 재종제 휘 상윤공 앞으로 출계하였고 셋째는 휘 무환이며 손은 치맹 치중 갑록 을록 치오 치한이다. 선생은 1854년(갑인) 12월 20일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명석한 두뇌와 총명으로 학문하기를 좋아하여 선대의 유학 정신을 이어받아 대문장가로 자리를 굳혀나갔다. 선생의 문장학행은 영남사림에서 인정을 받음은 물론 교남지청기지
청송군사열전 청송독립운동사 국사 편찬위원회 공훈록 대구 망우공원 항일운동 기념탑에 등재되었고 당대의 한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으며 선생의 유고집이 남아있다. 선생이 42세 되던 1895년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되는 등 국내외 정세는 일본의 간교한 침략행위가 노골화되자 전국각지에서 사림이 중심이 된 창의가 일어나 일제에 항거하는 구국투쟁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청송에서도 1896년(병신)에 사"를 지어 비장하고 결의에찬 창의선서를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어느 국가의 국방총챙도 표현하기 어려운 명문으로 "국난을 당하여 간절한 밀지가 내려지니 신민들이 감읍하여 먹던 밥을 토하고 피를 토할 일이니 칼날을 밟으라 한들 마다할 수 없는 일로서 화를 자초하지 말 것"이라는 결연한 창서사를 등단 선언 후 용진천 백사장에서 의병훈련을 시작할 당시 선생을 비롯한 청송유림선열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고장을 지키겠다는 그 용기와 충정은 오늘에 사는 후손들로서는 그 정신과 기개가 참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용진천 백사장에서의 의병훈련은 한말관군의 군대훈련을 본사람도 없어 한양을 출입하며 남대문 밖 관군의 훈련 상황을 구경한 보부상낭인의 조언으로 훈련을 시작하였다하니 병신창의 청송의진의 승패전적을 논하는 차원보다 오직 당시 선생을 비롯한 청송유림 82 현 선열의 우국애향 선비정신에 감격할 뿐이며 일제 36년간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생활을 거치면서 1945년 2차 대전후 조국광복과 독립운동에까지 그 정신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시지 못한 채 1927년(정묘) 9월12일로 타개하시니 향년 73세였다. 그로부터 110여년이 흘러 국가는 2005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에서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 서훈으로 "국국포장"을 추서하였기에 유족들의 결의를 모아 증손 숭조씨가 적원일기 병신창의 등 유족회관련자료
를 수합하여 선생의 사적비 비명을 청하기에 방후손으로서 사양치 못하고 미흡하나마 비명을 하였으나 조상에 누가 될까 우려하면서 감연원두에 사적비를 세우고 사우를 건립하여 선생과 연원된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조상의 빛난 얼을 기리고자함이며 오늘날 그 공적이 기록되어 후세에 전달되니 감회는 무량하나 그 충절 그 학문을 글로다 표현하지 못함이 아쉽기 그지 없다. 옛적부터 내려다 본 산야는 말이 없으니 나라 잃은 서러움 잊어버리고 저 맑은 창공도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니 뜨거운 눈물도 지워졌지만 사선을 넘나들며 구국의 일념으로 이 땅 지키려던 선생의 숭고한 희생정신. 아! 천만년이 흘러도 어찌 잊으리요. 여기 고귀한 혼 붉게 물들어 남긴 그 흔적 만세불변 우리 역사에 영원히 아름답게 꽃피어 이 강산 온 누리에 길이 빛나리.
정해년(2007) 추양절 전 경상북도 지사 정책보좌관 서기관 방 후손 호상 삼가 짓고 쓰다.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해평김씨 숭조원 애국지사 약우당 김상길 선생 사적비를 찾아가고 있다.
애국지사의 손자가 되시는 김치현 선생과 연락이 되어 직접 안내해주셨다.
GPS 상의 주소는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281-1이다.
헌성기
해평김씨 군수공파 몽암공후 감연 원두에 자리하다.
천녕의 족사를 가진 우리 문이 몽암공에 이르러 이곳 청송에 입향한지 300여년 이다.
영남사림의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지지당 선생을 비롯 몽암공, 고헌공, 송하공 등 문필가가 배출되었고 한말에 약우당 선생은 의병장으로 구국 독립운동에 기여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조상의 숨결이 묻은 감연 명당에 숭조원을 조성하여 숭조사상 고취와 후손들의 화합의 장으로 가꾸어 가기 위하여 헌성에 참여하신 분들을 기록하여 귀감이 되게 하리라.
2008년 1월 일
후손대표 30세손 숭조 삼가짓다.
若愚堂 金相吉 先生 事蹟碑(약우당 김상길 선생 사적비)
若愚堂 金相吉 先生 事蹟碑(약우당 김상길 선생 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