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산40-11
- 탐방로그
-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이자, 고양의 독립운동 유적지인 흥국사는 한미산에 있다. 한미산에 있는 흥국사 현판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인데, 나라의 국운을 회복하고 청정 불법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결성한 만일회의 역사를 담고 있는 비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흥국사 건물들이 보이는데, 아미타전이라고 불리는 대방, 주불전인 약사전 그리고 나한전과 명부전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미산 흥국사 약사전
이 약사전은 흥국사의 주불전이다.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1년(661년)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홍서사라고 이름했다. 조선 숙종 12년(1686) 절을 다시 지었고, 영조 46년(1770)에는 이 절의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고 하여 절 이름을 흥국사로 고쳤다. 이와 함께 약사전을 크게 중건하고 궁궐의 상궁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선학을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인 고종 4년(1867) 승려 뇌응이 약사전을 다시 세웠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수리해 왔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정면의 기둥머리에는 용 조각의 안초공이 창방과 평방에 직각 방향으로 놓여 결구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도 대들보 위에 직각방향으로 놓여 합각부의 하중을 받아 측면 평주와 대들보에 분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충량의 머리에 용 조각이 공포와 잘 어우러져 있다.
이 약사전은 흥국사의 주불전이다.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1년(661년)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홍서사라고 이름했다. 조선 숙종 12년(1686) 절을 다시 지었고, 영조 46년(1770)에는 이 절의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고 하여 절 이름을 흥국사로 고쳤다. 이와 함께 약사전을 크게 중건하고 궁궐의 상궁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선학을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인 고종 4년(1867) 승려 뇌응이 약사전을 다시 세웠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수리해 왔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정면의 기둥머리에는 용 조각의 안초공이 창방과 평방에 직각 방향으로 놓여 결구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도 대들보 위에 직각방향으로 놓여 합각부의 하중을 받아 측면 평주와 대들보에 분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충량의 머리에 용 조각이 공포와 잘 어우러져 있다.
羅漢殿(나한전)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漢美山 興國寺 羅漢殿
향토유적 제34호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
흥국사 본전인 약사전에서 보아 오른쪽에서 위치하고 있는 나한전은 약사전에 비하여 규모가 약간 작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나한전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의 기단 위에 4개의 배수구가 있는 직사각형의 초석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가운데 계단을 두었다. 나한전은 광서 4년(1878)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으며 머리에는 평방과 창방을 돌리고 그 위에 여러개의 공포를 짜 맞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의 문살로 장식되었으며 건물의 측면은 단청을 한 방풍판이 있으나 특별한 문양이나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나한전 안에는 1832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원래 나한전 정면에는 초서체로 쓴 뛰어난 필체의 칠성각이라 쓰여진 현찬이 걸려 있었는데 이 현판은 조선조 후기의 김성근이 소나무판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 법당에 나한을 모신 관계로 나한전이란 현판으로 바꾸고 건물의 명칭을 나한전으로 부르게 되었다.
漢美山 興國寺 羅漢殿
향토유적 제34호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
흥국사 본전인 약사전에서 보아 오른쪽에서 위치하고 있는 나한전은 약사전에 비하여 규모가 약간 작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나한전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의 기단 위에 4개의 배수구가 있는 직사각형의 초석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가운데 계단을 두었다. 나한전은 광서 4년(1878)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으며 머리에는 평방과 창방을 돌리고 그 위에 여러개의 공포를 짜 맞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의 문살로 장식되었으며 건물의 측면은 단청을 한 방풍판이 있으나 특별한 문양이나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나한전 안에는 1832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원래 나한전 정면에는 초서체로 쓴 뛰어난 필체의 칠성각이라 쓰여진 현찬이 걸려 있었는데 이 현판은 조선조 후기의 김성근이 소나무판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 법당에 나한을 모신 관계로 나한전이란 현판으로 바꾸고 건물의 명칭을 나한전으로 부르게 되었다.
왼쪽에는 冥府殿(명부전)이 있다.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이자, 고양의 독립운동 유적지인 흥국사는 한미산에 있다.
興國寺(흥국사)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62호
조선말기 불교계가 왜색화 되고 타락하게 되자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뜻이 있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흥국사 만일회 결사를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고 독경, 선 수행, 염불수행, 자작노동으로 지켜야할 청규를 상기시키며 이를 통해 기울어가는 나라의 국운을 회복하고, 청정 불법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만일회를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는 1904년 해송스님의 주도로 시작되어 일제의 간섭으로 1929년 중단된 만일회의 역사를 기록한 비문입니다. 흥국사의 만일회는 만일동안 국태민안과 불법옹호 및 청정계율을 통하여 스님과 신도들이 부처님의 법을 참답게 실천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나라의 원찰로서 중요한 역할의 사찰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문 앞면에는 흥국사가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내용과 이후 조선 영조 때 흥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만일회에 큰 시주를 베푼 사람의 명단인 대단월질과 민일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인 대중질이 있습니다. 앞의 명단에는 대한제국의 고종을 비롯하여 순비 엄씨, 귀인 양씨와 승려 및 신도들의 이름이, 끝부분에는 흥국사 주지인 해송스님을 비롯한 여러 승려와 신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만일회 : 만일(萬日)동안 수행, 기도 등을 하는 의식
자작노동 : 스스로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
대단월질 : 단월은 사찰이나 스님에게 물건을 베푸는 불교신자를 의미하여, 대단월질은 큰 시주를 베푼 사람의 기록을 말합니다.
조선말기 불교계가 왜색화 되고 타락하게 되자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뜻이 있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흥국사 만일회 결사를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고 독경, 선 수행, 염불수행, 자작노동으로 지켜야할 청규를 상기시키며 이를 통해 기울어가는 나라의 국운을 회복하고, 청정 불법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만일회를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는 1904년 해송스님의 주도로 시작되어 일제의 간섭으로 1929년 중단된 만일회의 역사를 기록한 비문입니다. 흥국사의 만일회는 만일동안 국태민안과 불법옹호 및 청정계율을 통하여 스님과 신도들이 부처님의 법을 참답게 실천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나라의 원찰로서 중요한 역할의 사찰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문 앞면에는 흥국사가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내용과 이후 조선 영조 때 흥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만일회에 큰 시주를 베푼 사람의 명단인 대단월질과 민일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인 대중질이 있습니다. 앞의 명단에는 대한제국의 고종을 비롯하여 순비 엄씨, 귀인 양씨와 승려 및 신도들의 이름이, 끝부분에는 흥국사 주지인 해송스님을 비롯한 여러 승려와 신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만일회 : 만일(萬日)동안 수행, 기도 등을 하는 의식
자작노동 : 스스로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
대단월질 : 단월은 사찰이나 스님에게 물건을 베푸는 불교신자를 의미하여, 대단월질은 큰 시주를 베푼 사람의 기록을 말합니다.
漢美山 興國寺 萬日會碑紀(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기)
漢美山(老姑山) 興國寺 萬日會碑記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만일회비기
금년 8월 흥국사 해송 주지스님께서 돈을 내어 비석을 마련하고 상좌 윤진 스님을 개운사에 머물고 있는 내게로 보내어 만일회비기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절의 기록을 살펴보니, 근년의 큰 업적이 만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량을 장엄하고 상정을 조성하여 사람들을 감동케 한 일이 자못 많다. 그러나 노스님께서는 진실한 가풍만을 준수할 뿐이요 일을 떠벌려서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그저 도량에 모여 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탑묘를 장엄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재계하여 계율을 지키기를 수십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여타의 허무를 뇌까리고 실컷 노닥거리며 부처님을 속이는 무리들과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다.
전해오기를, 이 절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 해동의 화엄초조 대사가 원효대사가 양주 천성산으로부터 북한산에 와서 머물면서 몇 곳의 절을 지었으니, 북한산성 서쪽의 원효대가 그 첫째요, 노고산의 홍서암이 그 다음이며, 석조약사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각한 것으로써 1천백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엄연히 모셔져 있다고 한다.
암자를 사로 바꾸어 흥국의 호를 내린 것은 조선 영조 때의 일이다. 산명을 한미로 바꾼 것은 노고(할미)의 소리를 옮긴 것이요 별다른 의미는 없다. 영조가 ○저에 계실 때에 북한산에 와서 향을 사룬 적이 있었더니, 왕위에 오른 뒤 세모에 소녕원에 거둥하던 길에 이 절에 들렸다가 대설을 만났다. 영조는 버들가지로 「來心有喜 尺雪驗豊徵 : 조래심유희 척설험풍진(아침나절에 기분이 상쾌하더니, 한 자 눈이 내려 풍년을 예고하네)」라는 5언시구를 전각에 새겨두고, 또 약사전 3자를 써서 내거니, 사중이 모두 기뻐하였다.
철종 갑인년(1854) 봄에 장련군 학서사에서 옹정 신해년(1731)에 주조한 4백여근짜리 범종과 삼존불상, 칠성목탱을 모셔왔다. 철종 무오년(1858) 여름 신사 박수량이 거금을 희사하여 도량에 7층의 축대를 쌓았는데, 매 층이 한 길씩이나 되니 이 얼마나 큰 공사인가.
고종 정묘년(1867) 가을에 화주 곽명스님이 약사전을 중건하고, 고종 병자년(1876) 여름에 화주 뇌응스님이 칠성전을 짓고, 고종 무인년(1878) 가을에 주실 완해스님이 주선하여 내탕금을 얻어 괘불탱화를 조성하니 대단히 넓고 길었다.
광무 임인년(1902)에 화주 뇌응스님이 나한전과 산신각을 세웠으며, 광무 갑진년(1904) 10월 회주 완해스님이 선도하여 상궁 김정덕행과 장정심화, 정대덕행과 함께 발원하여 만일회를 창설하였다. 만일회란 백련사의 이칭으로써 30년 동안 염불하며 부처님을 모실 것을 기약하는 모임이다. 그때에 대중들이 혜월스님을 선발하여 연사의 화주로 삼았다. 이듬해 을사년(1905) 봄에 진관사의 해송스님을 맞이하여 연사의 회주로 삼았다.
융희 무신년 가을에 상궁 오씨와 신사 원학주가 중흥사의 금고를 사서 사중에 헌납하였다. 1911년 건봉사의 회명스님이 연사의 성취를 위하여 양양의 논 80두락을 헌납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 서울의 청신녀 박신심월이 불량답을 헌납하며 절 땅을 함께 매각하여 통천의 땅을 마련하니, 1년에 도조가 4백여 말이 되었다. 1912년 혜월스님이 입적하매 이듬해부터 대중의 요청에 따라 해송스님이 화주의 일을 겸임하였다. 그해 신녀 정원만행이 3백금을 내어 상해 빈가정사판 대장경을 구입하여 사중에 보관하였다. 1913년 겨울 주실 해송스님과 뇌응·풍곡·호봉스님 등이 협력하여 국유림 26정 9반 8무를 임대받으니, 원래 사유림은 30정 9반 5무였다.
1915년 여름에 대중이 건물 2동 32간을 짓고, 1917년에 또 향각과 동별당 2동 14간을 지으니, 대가람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여름에서 겨울까지 화엄법회를 거듭 개설하였다고 한다.
아아! 오늘날 사문의 풍조는 예전과 아주 달라서 부처님을 팔아먹고 상주물을 함부로 쓰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며 바깥에 권속과 사가를 두어 저자를 이루니, 거의 사문으로서의 행실을 잃어버린 지경이다. 그러나 해송스님과 그 청정대중들은 연사를 맺은 이래 26년 동안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함께 기십만번 염불 정진하여 깊이 불법의 바다에 들어갔으니, 과연 경에 이른 바대로 연잎 위에 성태가 이미 향기롭구나. 또한 사묘를 장엄하고 화엄법계를 연설하니, 이와 같은 가람은 옛날 불교가 융성했던 때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거늘. 하물며 말법시대에 있어서랴!
너희들 태산·화산과 노고산의 영령들은 때맞추어 와서 길이 산문을 보존할지어다.
불기 2956년 기사 (서기 1929년) 중춘일(양력 3월 일)
귀산사문 정호(박한영) 찬(글 지음) 성당 김돈희 서(글 씀)
[비석뒷면] 대시주 순서 고종황제폐하 순비갑인생 엄씨 외 18인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만일회비기
금년 8월 흥국사 해송 주지스님께서 돈을 내어 비석을 마련하고 상좌 윤진 스님을 개운사에 머물고 있는 내게로 보내어 만일회비기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절의 기록을 살펴보니, 근년의 큰 업적이 만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량을 장엄하고 상정을 조성하여 사람들을 감동케 한 일이 자못 많다. 그러나 노스님께서는 진실한 가풍만을 준수할 뿐이요 일을 떠벌려서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그저 도량에 모여 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탑묘를 장엄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재계하여 계율을 지키기를 수십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여타의 허무를 뇌까리고 실컷 노닥거리며 부처님을 속이는 무리들과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다.
전해오기를, 이 절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 해동의 화엄초조 대사가 원효대사가 양주 천성산으로부터 북한산에 와서 머물면서 몇 곳의 절을 지었으니, 북한산성 서쪽의 원효대가 그 첫째요, 노고산의 홍서암이 그 다음이며, 석조약사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각한 것으로써 1천백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엄연히 모셔져 있다고 한다.
암자를 사로 바꾸어 흥국의 호를 내린 것은 조선 영조 때의 일이다. 산명을 한미로 바꾼 것은 노고(할미)의 소리를 옮긴 것이요 별다른 의미는 없다. 영조가 ○저에 계실 때에 북한산에 와서 향을 사룬 적이 있었더니, 왕위에 오른 뒤 세모에 소녕원에 거둥하던 길에 이 절에 들렸다가 대설을 만났다. 영조는 버들가지로 「來心有喜 尺雪驗豊徵 : 조래심유희 척설험풍진(아침나절에 기분이 상쾌하더니, 한 자 눈이 내려 풍년을 예고하네)」라는 5언시구를 전각에 새겨두고, 또 약사전 3자를 써서 내거니, 사중이 모두 기뻐하였다.
철종 갑인년(1854) 봄에 장련군 학서사에서 옹정 신해년(1731)에 주조한 4백여근짜리 범종과 삼존불상, 칠성목탱을 모셔왔다. 철종 무오년(1858) 여름 신사 박수량이 거금을 희사하여 도량에 7층의 축대를 쌓았는데, 매 층이 한 길씩이나 되니 이 얼마나 큰 공사인가.
고종 정묘년(1867) 가을에 화주 곽명스님이 약사전을 중건하고, 고종 병자년(1876) 여름에 화주 뇌응스님이 칠성전을 짓고, 고종 무인년(1878) 가을에 주실 완해스님이 주선하여 내탕금을 얻어 괘불탱화를 조성하니 대단히 넓고 길었다.
광무 임인년(1902)에 화주 뇌응스님이 나한전과 산신각을 세웠으며, 광무 갑진년(1904) 10월 회주 완해스님이 선도하여 상궁 김정덕행과 장정심화, 정대덕행과 함께 발원하여 만일회를 창설하였다. 만일회란 백련사의 이칭으로써 30년 동안 염불하며 부처님을 모실 것을 기약하는 모임이다. 그때에 대중들이 혜월스님을 선발하여 연사의 화주로 삼았다. 이듬해 을사년(1905) 봄에 진관사의 해송스님을 맞이하여 연사의 회주로 삼았다.
융희 무신년 가을에 상궁 오씨와 신사 원학주가 중흥사의 금고를 사서 사중에 헌납하였다. 1911년 건봉사의 회명스님이 연사의 성취를 위하여 양양의 논 80두락을 헌납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 서울의 청신녀 박신심월이 불량답을 헌납하며 절 땅을 함께 매각하여 통천의 땅을 마련하니, 1년에 도조가 4백여 말이 되었다. 1912년 혜월스님이 입적하매 이듬해부터 대중의 요청에 따라 해송스님이 화주의 일을 겸임하였다. 그해 신녀 정원만행이 3백금을 내어 상해 빈가정사판 대장경을 구입하여 사중에 보관하였다. 1913년 겨울 주실 해송스님과 뇌응·풍곡·호봉스님 등이 협력하여 국유림 26정 9반 8무를 임대받으니, 원래 사유림은 30정 9반 5무였다.
1915년 여름에 대중이 건물 2동 32간을 짓고, 1917년에 또 향각과 동별당 2동 14간을 지으니, 대가람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여름에서 겨울까지 화엄법회를 거듭 개설하였다고 한다.
아아! 오늘날 사문의 풍조는 예전과 아주 달라서 부처님을 팔아먹고 상주물을 함부로 쓰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며 바깥에 권속과 사가를 두어 저자를 이루니, 거의 사문으로서의 행실을 잃어버린 지경이다. 그러나 해송스님과 그 청정대중들은 연사를 맺은 이래 26년 동안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함께 기십만번 염불 정진하여 깊이 불법의 바다에 들어갔으니, 과연 경에 이른 바대로 연잎 위에 성태가 이미 향기롭구나. 또한 사묘를 장엄하고 화엄법계를 연설하니, 이와 같은 가람은 옛날 불교가 융성했던 때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거늘. 하물며 말법시대에 있어서랴!
너희들 태산·화산과 노고산의 영령들은 때맞추어 와서 길이 산문을 보존할지어다.
불기 2956년 기사 (서기 1929년) 중춘일(양력 3월 일)
귀산사문 정호(박한영) 찬(글 지음) 성당 김돈희 서(글 씀)
[비석뒷면] 대시주 순서 고종황제폐하 순비갑인생 엄씨 외 18인
不二門(불이문)
不二門(불이문)의 뒤편에는 解脫門(해탈문)으로 되어 있었다.
고양의 독립운동 유적지 흥국사 - 의병장 연기우, 민일회비기비석
고양의 천년고찰 흥국사는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였다. 그는 강화진위대 출신으로 의병조직을 체계화한 고양지역 최초의 부대장이다. 박석고개 등에서 고양,양주 등으로 넘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경기북부지역으로 그 활동권역을 넓혀나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흥국사 입구에 위치한 만일회비기비석은 1904년부터 1929년까지 매일 국가의 독립과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흥국사의 창건과 연혁, 보수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당초에는 만일동안 매일 법회를 올릴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삼십년은 채우지 못하였다.
이 안내문은 고양의 3.1운동 민족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고양시에서 세움.
고양의 천년고찰 흥국사는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였다. 그는 강화진위대 출신으로 의병조직을 체계화한 고양지역 최초의 부대장이다. 박석고개 등에서 고양,양주 등으로 넘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경기북부지역으로 그 활동권역을 넓혀나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흥국사 입구에 위치한 만일회비기비석은 1904년부터 1929년까지 매일 국가의 독립과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흥국사의 창건과 연혁, 보수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당초에는 만일동안 매일 법회를 올릴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삼십년은 채우지 못하였다.
이 안내문은 고양의 3.1운동 민족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고양시에서 세움.
고양의 독립운동 유적지 흥국사 - 의병장 연기우, 민일회비기비석
고양의 천년고찰 흥국사는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였다. 그는 강화진위대 출신으로 의병조직을 체계화한 고양지역 최초의 부대장이다. 박석고개 등에서 고양,양주 등으로 넘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경기북부지역으로 그 활동권역을 넓혀나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흥국사 입구에 위치한 만일회비기비석은 1904년부터 1929년까지 매일 국가의 독립과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흥국사의 창건과 연혁, 보수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당초에는 만일동안 매일 법회를 올릴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삼십년은 채우지 못하였다.
이 안내문은 고양의 3.1운동 민족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고양시에서 세움.
고양의 천년고찰 흥국사는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였다. 그는 강화진위대 출신으로 의병조직을 체계화한 고양지역 최초의 부대장이다. 박석고개 등에서 고양,양주 등으로 넘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경기북부지역으로 그 활동권역을 넓혀나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흥국사 입구에 위치한 만일회비기비석은 1904년부터 1929년까지 매일 국가의 독립과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흥국사의 창건과 연혁, 보수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당초에는 만일동안 매일 법회를 올릴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삼십년은 채우지 못하였다.
이 안내문은 고양의 3.1운동 민족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고양시에서 세움.
고양의 독립운동 유적지 흥국사 - 의병장 연기우, 민일회비기비석
고양의 천년고찰 흥국사는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였다. 그는 강화진위대 출신으로 의병조직을 체계화한 고양지역 최초의 부대장이다. 박석고개 등에서 고양,양주 등으로 넘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경기북부지역으로 그 활동권역을 넓혀나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흥국사 입구에 위치한 만일회비기비석은 1904년부터 1929년까지 매일 국가의 독립과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흥국사의 창건과 연혁, 보수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당초에는 만일동안 매일 법회를 올릴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삼십년은 채우지 못하였다.
이 안내문은 고양의 3.1운동 민족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고양시에서 세움.
고양의 천년고찰 흥국사는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였다. 그는 강화진위대 출신으로 의병조직을 체계화한 고양지역 최초의 부대장이다. 박석고개 등에서 고양,양주 등으로 넘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경기북부지역으로 그 활동권역을 넓혀나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흥국사 입구에 위치한 만일회비기비석은 1904년부터 1929년까지 매일 국가의 독립과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흥국사의 창건과 연혁, 보수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당초에는 만일동안 매일 법회를 올릴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삼십년은 채우지 못하였다.
이 안내문은 고양의 3.1운동 민족정신을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고양시에서 세움.
흥국사 소개
흥국사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인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원년)에 당대 최고의 고승인 원효스님께서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시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산을 내려와 이곳에 이르시게 되었고 서기를 발하고 계신 석조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산을 내려와 이곳에 이르시게 되었고 서기를 발하고 계신 석조 역사여래 부처님을 보신 원효스님께서 인연도량이라 생각하여 본선에 약사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시며 절이름을 홍성암이라고 하고 오늘의 호국사를 창건하셨습니다.(미타전 아미타굴 복장 연기문)
흥국사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인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원년)에 당대 최고의 고승인 원효스님께서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시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산을 내려와 이곳에 이르시게 되었고 서기를 발하고 계신 석조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산을 내려와 이곳에 이르시게 되었고 서기를 발하고 계신 석조 역사여래 부처님을 보신 원효스님께서 인연도량이라 생각하여 본선에 약사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시며 절이름을 홍성암이라고 하고 오늘의 호국사를 창건하셨습니다.(미타전 아미타굴 복장 연기문)
고양 흥국사 대방(高陽 興國寺 大房)
지정번호 :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 592호 / 지정일 : 2014.07.01. / 수량 : 건축물 1동 330㎡ /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흥국사길 82(흥국사 경내) / 소유자 : 고양 흥국사
대방(大房)은 전통사찰 흥국사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어 일명 아미타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04년에 25칸으로 증축하였으며, 1912년 또는 1915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말 염불이 성행하고 접대를 위한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주요 불전과는 다른 기능으로 대방이 지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규모가 큰 절, 특히 왕실의 원찰을 중심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사찰의 여러 기능을 하나로 합쳐 경제성과 합리성을 추구한 점에서 근대 불교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흥국사 대방은 염불당 형식의 큰 방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승방(스님들이 기거하며 불도를 닦는 공간). 부억, 누각, 마루, 툇마루 등으로 이루어 졌으며, 규모는 좌측 2칸은 부엌, 가운데 3칸은 큰 방, 우측 2칸은 승방의 구조이다. 흥국사 대방은 19세기부터 나타난 대방이 대부분 사라진 가운데 조선 말기 대방의 전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원형대로 잘 보존하고 있으며, 근대 불교 대방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정번호 :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 592호 / 지정일 : 2014.07.01. / 수량 : 건축물 1동 330㎡ /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흥국사길 82(흥국사 경내) / 소유자 : 고양 흥국사
대방(大房)은 전통사찰 흥국사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어 일명 아미타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04년에 25칸으로 증축하였으며, 1912년 또는 1915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말 염불이 성행하고 접대를 위한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주요 불전과는 다른 기능으로 대방이 지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규모가 큰 절, 특히 왕실의 원찰을 중심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사찰의 여러 기능을 하나로 합쳐 경제성과 합리성을 추구한 점에서 근대 불교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흥국사 대방은 염불당 형식의 큰 방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승방(스님들이 기거하며 불도를 닦는 공간). 부억, 누각, 마루, 툇마루 등으로 이루어 졌으며, 규모는 좌측 2칸은 부엌, 가운데 3칸은 큰 방, 우측 2칸은 승방의 구조이다. 흥국사 대방은 19세기부터 나타난 대방이 대부분 사라진 가운데 조선 말기 대방의 전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원형대로 잘 보존하고 있으며, 근대 불교 대방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양 흥국사 극락구품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흥국사 미타전 안에 봉안된 국락구품도는 가로 205㎝, 세로 146㎝ 크기로, 전체 화면을 상하좌우 각각 3등분하여 총 9면에 아미타불에 의한 극락정토의 아미타회상 장면과 왕생 장면을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화법을 보면 각 화면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색채는 전체적으로 짙은 녹색과 밝은 황토색으로 채색하고 홍색·백색·청색을 가미하였는데, 필선은 모두 가는 선으로 묘사하였다. 인물들과 연화, 극락조, 구름 등은 섬세하면서도 유연하게 처리되었으며, 인물들의 얼굴자세도 생동감이 있다. 산수표현에 있어 산을 몇 개의 선으로만 처리하고, 나무의 잎을 빗살문으로 표현하는 등 도식적인 느낌을 주나, 공간의 깊이감을 살리기 위해서 장식적인 구름을 배치하였다.
흥국사 미타전 안에 봉안된 국락구품도는 가로 205㎝, 세로 146㎝ 크기로, 전체 화면을 상하좌우 각각 3등분하여 총 9면에 아미타불에 의한 극락정토의 아미타회상 장면과 왕생 장면을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화법을 보면 각 화면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색채는 전체적으로 짙은 녹색과 밝은 황토색으로 채색하고 홍색·백색·청색을 가미하였는데, 필선은 모두 가는 선으로 묘사하였다. 인물들과 연화, 극락조, 구름 등은 섬세하면서도 유연하게 처리되었으며, 인물들의 얼굴자세도 생동감이 있다. 산수표현에 있어 산을 몇 개의 선으로만 처리하고, 나무의 잎을 빗살문으로 표현하는 등 도식적인 느낌을 주나, 공간의 깊이감을 살리기 위해서 장식적인 구름을 배치하였다.
고양 흥국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흥국사 미타전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는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한 머리 형태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평편하게 깍은 후 눈, 코, 입 등을 조각하여 다소 평면적이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양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리는 결가부좌한 자세이다. 양어꺠를 모두 감싼 옷은 자연스럽게 흘려내려 차례로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얼굴의 표현이나 옷주름, 조각수법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보이고 있고 1758년에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18세기를 전후한 불상으로 생각된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매우 부드러운 느낌의 이 불상은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흥국사 미타전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는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한 머리 형태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평편하게 깍은 후 눈, 코, 입 등을 조각하여 다소 평면적이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양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리는 결가부좌한 자세이다. 양어꺠를 모두 감싼 옷은 자연스럽게 흘려내려 차례로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얼굴의 표현이나 옷주름, 조각수법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보이고 있고 1758년에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18세기를 전후한 불상으로 생각된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매우 부드러운 느낌의 이 불상은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藥師殿(약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