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룡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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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19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公(공)의 휘는 翰龍(한룡)이고, 자는 順玉(순옥)이며 아호는 錦雲(금운)이다. 성은 경주최씨이며, 文昌候(문창후) 崔致遠(최치원) 선생을 시조로 하는 관가정공파 경산공 지파이며, 世系(세계) 제二七(27)세손이다. 祖(조)의 휘 潤坤(윤곤)은 통정대부 부호군 중추부사이고, 考(고)의 휘 鳳昇(봉승)은 선공감역이며, 妣(비)는 안인 여강 李(이)씨다. 공은 五(오)형제 중 三子(삼자)로

1849년 3월 12일에 일곡리에서 출생
1866년 밀양 朴(박)씨 大賢(대현)과 결혼하였고
1874년에 감찰에 제수받았다
1917년 10월 26일에 서거하였으며, 묘는 일곡동 무학산등에 있다.
2010년 5월 8일 成均館(성균관) 典仁(전인) 牙山(아산) 蔣奉埰(장봉채) 謹撰(근찬)

입석추진위원회
경주최씨 관가정공파 경산공 지파 종중
금운 최한룡 애국지사 기념사업회
일곡동 진흥회 입석 경내부지 제공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일곡마을 마을쉼터 항일애국지사 금운 최한룡 의병장 기적비를 찾아왔다.
GPS 상의 주소는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192이다.
抗日愛國志士 錦雲 崔翰龍 義兵將 紀績碑
(항일애국지사 금운 최한룡 의병장 기적비)
공은 1907년 4월부터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격문을 발표하였고, 1907년 7월에는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1900년에는 시조 고운선생의 영정을 이봉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1906년 산남의진에 참전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가 신광면 우각전투에서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당할 때 공도 연루되어 일본군의 악형에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1907년 4월부터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5회의 격문을 발표하였다. 즉 천하에 고시하는 글(1907.4).국채상환 건(1907.5). 단발령의 건(1907.7). 애급근대사를 읽고 대한국의 위급함을 탄함(1908.1). 국체로서 적국을 토벌할 건(1908.1) 등을 통해서 국민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7년 7월경 청도 적천사의 의병 70여 명으로 창의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1908년 6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심문과 악형을 받았다. 가족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해인사에 은거했고 신병이 무거워 밀양에 거주하는 사위 박재하의 치료와 요양을 받았으나 1917년 10월 26일에 사망.순국하였다. 1900년 해인사에 소장된 보물급 문화재 정리에 동참한 공이 고운선생의 영정을 서장각에서 발견하고 주지승 벽운과 방장회에 공의한 결과, 경주최씨 문중에서 봉안할 사항으로 결의되어 영정을 품에 안고 일곡에 이봉하고, 현 계동사에 봉안하여 숭조정신을 더 높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