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40-6
- 탐방로그
- 송용현 묘를 찾아가기 전, 산 40-1 도로변에 송용현 공적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면 망향제단비가 있고, 망향제단비를 지나면 묘소가 보인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大韓獨立鬪士公諱龍顯建國愛族取義記念碑(대한독립투사 공 휘 용현 건국애족 취의기념비)
대한독립 투사 공 휘 용현 건국 애족 취의 기념비
[수훈]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연후에 내 몸을 사랑하라 - 송용현 訓(훈)
제289호 훈장증 - 고 송용현
위는 우리나라 자주 독립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국무총리 강영훈 /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입함 / 총무처장관 이연택
[수훈]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연후에 내 몸을 사랑하라 - 송용현 訓(훈)
제289호 훈장증 - 고 송용현
위는 우리나라 자주 독립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8월 15일 대통령 노태우
국무총리 강영훈 /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입함 / 총무처장관 이연택
先誠(선성)과 袷事之計(겹사지계)는 人之常道(인지상도)라 여기 我邦巨族(아방거족) 宋氏(송씨)가 그 빛나는 조상의 혁혁한 유업을 오늘에 더욱 밝혀 上奉下承(상봉하승)하려는 거룩한 뜻으로 雄惲(웅운)한 世阡(세천_을 마련하여 건국애족을 취의하신 숭조의 정성을 다하니 인륜이 투박한 오늘날 頹薄(퇴박)한 오늘날 擧世垂範(거세수범)됨으로 그 장거를 羨望하여 宣彰(선창)아니할수없다.
宋山(송산)에 磨刀(마도)하고 龍水(용수)로 세심하니 文民赫世(문민혁세)가 跋美(발미)로다.
歷世祖靈(역세조령)을 奉侍同阡(봉시동천)하니 上承下授(상승하수)에 潛德永彰(잠덕영창)하리라
有頌德者必有陽報(유송덕자 필양보)라 대한독립투사 取義偉勳(취의위훈) 德業望百載(덕업망백재)에 재기하니 輝煌高陽宋山(휘황고양송산)하여 萬域(만역)에 播映(파영)하다 후광은 萬年流長(만년유장)이요 현손은 承代不絶(승대불절)하리니 宋氏史(송씨사)에 赫史(혁사)이요 民族先誠(민족선성)에 彰範(창범)이로다
宋山(송산)에 磨刀(마도)하고 龍水(용수)로 세심하니 文民赫世(문민혁세)가 跋美(발미)로다.
歷世祖靈(역세조령)을 奉侍同阡(봉시동천)하니 上承下授(상승하수)에 潛德永彰(잠덕영창)하리라
有頌德者必有陽報(유송덕자 필양보)라 대한독립투사 取義偉勳(취의위훈) 德業望百載(덕업망백재)에 재기하니 輝煌高陽宋山(휘황고양송산)하여 萬域(만역)에 播映(파영)하다 후광은 萬年流長(만년유장)이요 현손은 承代不絶(승대불절)하리니 宋氏史(송씨사)에 赫史(혁사)이요 民族先誠(민족선성)에 彰範(창범)이로다
大韓獨立鬪士 礪山宋公 龍顯 之墓(대한독립투사 여산송공 용현 지묘)
大韓獨立鬪士 礪山宋公 龍顯 之墓
(대한독립투사 여산송공 용현 지묘)
(대한독립투사 여산송공 용현 지묘)
麗朝(려조)이래 千有餘載(천유여재)를 통하여 동방각족의 지위를 유지한 송성 여산후인 25대손으로 분향 경기 개풍군 토성면 곡령리 제마동 718 본가 송산선영하 출생 공은 유생시부터 국권회복의 大志(대지)를 품고 민족자결 자유독립국임을 주장하셨다. 기미독립선언과 때마추어 일제에 항거 공은 폭악무도한 일제 쇠사슬에 묵여서 서대문옥에 강금 옥사를 치르셨다. 공은 나를 버리고 오직 민족과 국가만을 위하는 애국애족하는 大志家(대지가)이셨다. 이러하신 분들의 충국 숭조 위덕으로 조국은 광복되었으나 또 국토양분으로 선영을 뒤에 두시고 한많은 피난길에 오르셨다. 갈망하시던 통일조국 원하시던 선영앞에 못가시고 이향땅 고양군 원당면 단표리 송산에 埋玉骨(매옥골)되셨다. 1982년 4월 일 공의 孝息(효식)들은 묘도비를 建立奉儀(건립봉의) 현 臨津(임진) 이남 후손들은 할아버님 할머님께 머리숙여 절할 곳이 마련된셈이다. 업적을 대강 근술 후손에게 전하려합니다. 공의 埋玉骨(매옥골) 安息(안식) 묘소에 略敍(약서) 世系羨門用表(세계연문용표) 묘도비를 건립하면서 공의 성인 취의의 영덕을 본받아 충국 숭조의 정신을 자손만데에 전함에 일조가 될가하여 근술하나이다.
麗朝(려조)이래 千有餘載(천유여재)를 통하여 동방각족의 지위를 유지한 송성 여산후인 25대손으로 분향 경기 개풍군 토성면 곡령리 제마동 718 본가 송산선영하 출생 공은 유생시부터 국권회복의 大志(대지)를 품고 민족자결 자유독립국임을 주장하셨다. 기미독립선언과 때마추어 일제에 항거 공은 폭악무도한 일제 쇠사슬에 묵여서 서대문옥에 강금 옥사를 치르셨다. 공은 나를 버리고 오직 민족과 국가만을 위하는 애국애족하는 大志家(대지가)이셨다. 이러하신 분들의 충국 숭조 위덕으로 조국은 광복되었으나 또 국토양분으로 선영을 뒤에 두시고 한많은 피난길에 오르셨다. 갈망하시던 통일조국 원하시던 선영앞에 못가시고 이향땅 고양군 원당면 단표리 송산에 埋玉骨(매옥골)되셨다. 1982년 4월 일 공의 孝息(효식)들은 묘도비를 建立奉儀(건립봉의) 현 臨津(임진) 이남 후손들은 할아버님 할머님께 머리숙여 절할 곳이 마련된셈이다. 업적을 대강 근술 후손에게 전하려합니다. 공의 埋玉骨(매옥골) 安息(안식) 묘소에 略敍(약서) 世系羨門用表(세계연문용표) 묘도비를 건립하면서 공의 성인 취의의 영덕을 본받아 충국 숭조의 정신을 자손만데에 전함에 일조가 될가하여 근술하나이다.
이에 선친묘도비를 건수봉의함에 있어 門会會頭人慈長兄芝榮公과 더부러 敦孝持(돈효지)를 베푼 榮春公(영춘공)의 선현을 모시는 原恪恭心(원각공심)은 후대에 효범이요 귀감이됨으로 그 贊賞(찬상)을 기술 길이 기념하나이다.
1982년 5월 29일 형호 찬술
1982년 5월 29일 형호 찬술
송용현 공적안내판은 산 40-1 도로변에 있다.
애국지사 송용현 선생의 묘 안내판이다.
애국지사 송용현 선생의 묘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송용현 선생은 개성 사람으로 1919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에
거주하였으며 같은 동리의 허내삼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시위군중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청년행동대원으로
개성경찰서 일본경찰들과 맞서 싸웠다. 이날의 만세시위
주동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송용현 선생은 개성 사람으로 1919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에
거주하였으며 같은 동리의 허내삼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시위군중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청년행동대원으로
개성경찰서 일본경찰들과 맞서 싸웠다. 이날의 만세시위
주동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안내판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면 망향제단비가 있다.
礪山宋氏 松都啼馬洞 先瑩 望鄕祭壇(여산송씨 송도제마동 선영 망향제단)
망향제단비를 지나면 묘소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