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목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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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228-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국열사 밀성박공 회산 휘 시목 기념비 안내판
순국열사 회산 박시목은 한말의 중추원 의관 박한철공의 아드님으로 일본 유학중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기미 3.1운동 이듬해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고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아 상해로 귀임하였다. 1927년 조헌영 전진한과 더불어 신간회를 조직하고 제3대 동경지회장이 되었다.
1940년 안재홍, 김서현과 함께 독립군양성의 선봉에 섰으며 한편으로 연안과 중경의 독립군을 연합하여 대일 선전포고를 계획하던중 북경에서 피검되어 신경감옥에 수감되었다. 나라잃은 백성은 천운도 인색함이라. 1943년 어느날 열사의 고결한 목숨을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앗아갔다. 이것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 마지막 길이다. 조국이 광복되고 45년이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아! 감회롭다. 임진왜란 당신 일문삼절로 이름높은 김치중의사의 정려와 언덕을 나란히 함에 순국열사의 나라위한 정신이 한층 더 돗보인다.
김치중 의사 의열각과 회산 박시목 선생 기념비
GPS 상의 주소는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228-5이다.
殉國烈士 密城朴公 晦山 諱 詩穆 紀念碑(순국열사 밀성박공 회산 휘 시목 기념비)
여기 외세의 압박으로 민족의 존립이 꺼져가는 역사의 현장에서 구국항쟁에 생을 불사른 순국열사가 있으니 회산선생이다. 공의 휘는 시목이요 호는 회산이니 밀성대군 언침의 후예 문하시중 언부는 중조요, 송은공 휘 익은 증좌의정에 충숙공의 시호가 내렸으니 선생의 18대조다. 공은 이땅에 일제의 마수가 뻗쳐오던 1894년 경남 밀양군 초동면 신월리에서 테어나시니 부친은 한말 의정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한철공이요 모친은 광산 노씨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수학중 의친왕의 추천으로 도일 동경 상지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공은 일제가 조국을 강점하는 민족의 비운이 닥치자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적국에서 머물면서 조선교육신문 조선학생옹호동맹등을 지도했다. 1911년 부친을 따라 이 고장 의성으로 전거 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다음해 중국 상해로 망명 활동, 1922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 그해 감찰월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 거금의 군자금을 모아 상해로 돌아갔다. 때에 이퇴계선생의 후예 동은은 그의 조부가 거금의 군자금을 공에게 주었는데 광복후 김동삼의 군자금 장부에 그대로 기록되어있다면서 공의 높은 애국심과
따를수 없는 인품을 흠모하였다. 해공 신익희도 공을 가리켜 그와같이 대범한 인격을 갖춘이는 본일이 없다고 회고하였다. 1922년 항일운동연합전전체인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고 도일하여 신간회 동경지회를 조직 이듬해 2월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철되고 조헌영, 김진한에 이어 동경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홍보전단을 배포 시위중 체포되어 1년 옥고를 치뤘다. 1930년 대구 팔공산에서 광산을 위장 경영 애국지를 규합 군자금확보, 모군 운동을 하면서 박건이란 가명을 썼다. 1940년 안재홍, 김시현등과 모의하고 광복군 증강을 위해 국내청년들을 아들 희규와 김창숙아들 찬기를 대동하여 연안으로 밀파시켰다. 맏아들 희수는 학생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쫒기었고 둘째아들 희돈과 아우 진목도 구국운동대열에서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투옥되고 준목아두 또한 20여명의 동자와 지시만을 기다리게했다. 종교계 지도자들과 거액의 군자금을 모으고 만주 연안의 독립동맹군을 합세 중경임정과 미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을 연결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추진중 나라와 겨레를 좀먹는 배신자의 밀고로 노석호와 희규는 산해연에서 공과 김시현은 북경에서 체포되고 국내외 백여명의 지사들도 체포구금되니 슬프도다 하늘이여! 나라와 겨레의 한을 씻지못한채 1943년 9월 신영감옥에서 아들 희규를 앞세워 보내고 뒤따라 순국하니 향년 50세요 희규는 21세였다. 선생의 아버님 한철공은 백절불굴의 항쟁을 자랑스레 군자금을 지원하고 학교설립, 시장개설, 수리사업등 교향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자손들의 투옥과 죽음앞에 끝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채 운명하니 이 어찌 공의 일문에만 슬픔이되랴! 부인은 성산이씨로 혹독한 탄압과 고통속에서도 일문을 지탱하고 효행과 부군의 군자금 모금, 자손들의 훈교에 전념하여 엄한 가풍을 세운 유가 태생의 현숙대담한 부인이었다. 공은 인도를 모르면 백사불성이란 부친의 교훈을 실천에 옮겨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동지들을 내몸같이 아끼니 주위가 이에 감화되었다. 정부에서는 공의 업적을 기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유골은 찾을길없어 섥단으로 선영하에 부인정자여사와 나란니 모시니 정해걸 군수의 지원과 일부성금으로 제현이 뜻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 나라와 겨레사랑에 빛이되게 하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