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창의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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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68-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대장 김상종 격문(국역)
오랑캐로 인해 문화민족이 변화됨은 고금에 듣지 못한바이고, 적국에 나라를 파는 행위는 천지간에 능히 용납할 수 없도다. 실로 타고난 본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인들 적개심을 품지않으랴. 오호라! 간사한 무리가 권병을 농락하니 나라의 재앙이 비로소 성해지고, 사방에 싸움터 이루어지니 민생의 도탄이 이미 지극하게 되었다. 임금이 머리를 깍는 일로 누차 흉악한 무리의 핍박을 받으니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국모가 시해를 당해 마침내 빈자리로 돌아감에 말하자니 슬프기 그지없도다. 사나운 위세로 협박함이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과 같고, 예의를 무사하여 버린 무도한 개,돼지와 다를바 없다. 의복이 모두 변하니 전통의관의 위의를 보지 못하고, 달력을 새로 반포하니 춘왕정월의 월령이 어긋났도다. 수천년 강상이 다시 떨치지 못하게 되고 삼백고을의 풍속이 모두 다 변하게 되었네. 적과는 하늘을 함께 할수 없으니, 군사를 일으키기에 어이 주저하랴. 제나라가 9대의 원수를 갚으니 춘추에는 의롭다 기록하였고, 주나라가 6월에 군사를 일으키니 북쪽의 오랑캐가 징계되었다. 돌아 보건대 우리 영남지방은 본디 정노의 고을이라 얼컬었다. 역대 우리 왕조에서 배양한 영향이 혈기있는 우리 민족에게 스며 들었고, 여러 선배들이 이어받은 유풍이 예약을 일삼는 마을에 깊어졌도다.
사람들은 적을 막아야 할 재능이 있고, 세상에는 특이한 자취가 많았도다. 임진난을 능히 물리쳤던 일은 실로 의병 소모의 힘이요 덕분이고, 무신난이 유린하던때에도 군사를 규합하는 의리를 지켰네. 더구나 지금은 섬 오랑캐가 중외에 창궐하니 사람이 누가 부모께서 끼친 신체를보존할 수 있으며, 간특한 무리가 조야에 퍼졌ㅇ르니 나라가 장차 조종의 세업을 실추하게 되었도다. 괴수를 섬멸하고 적을 무찌를 날 어이 없으랴. 뿌리를 제거하고 박힌 못 빼는것이 바로 지금이다. 인의의 방패가 팔도의 선비에게 보족하지 않았고, 충신의 갑옷은 반드시 작은 읍에도 우러졌네. 나라의 교서가 내려짐에 보는이 눈물흘리고 마음 상하지 않는 이 없었으며, 폭동을 진압하는 조칙이 선포됨에 듣는 이들이 주먹을 쥐고 손벽을 쳤도다. 의기가 격렬함바에야 얻지 않음이 있으랴. 이에 우리고을에서 공의를 크게 준발하여 의병을 창도하고 일으켰네. 할쏘고 말모는것이 익숙치않아 비록 드높은 공은 없더라도 방어하고 보위하기를 도모하니 오히려 극진한 충성이로다. 엎드려 바라건데 이 격무니 전달되는 날, 기한을 정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소리를 일제히 하여 힘을 합하자. 따르고 순종하는 사이에 충성의 힘 절로 드러나리라. 각기 스스로 힘쓰도록 할지어다.
병신창의기적비문
의병이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할때 의로서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며 적과 싸우는 자이다. 1895년 을미의병에서 부터 20여년간 계속된 한말의 의병전쟁은 근대 항일민족운동의 원류이다. 고려시대의 항몽의병을 비롯햇거 크고 작은 의병이 수없이 많았으나 을미병신의 의병전쟁은 독립군의 광복운동으로 어어지고 마침내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데 기초가 되었으니 더 한층 우뚝하다. 거슬러 상고하면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이 조야에 만연되고 갑오농민운동이 발발하여 다음해 일본랑인에 의해 국모시해의 변고와 단발령이 내려질때 민심은 백척간두에 흉흉하고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당시 고종의 밀지를 받은 이용호학사가 영남지방을 순회하며 창의모군을 독려하였다.
우리 고을 의성에도 향교에서 향회를 열고 문필과 덕망을 겸비한 운산 김상종공이 만장일치로 대장에 추대되어 취임과 동시에 모군하고 교련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창의 16일만에 구성성전이 있었고 4,5회 전투로 피간 30여명의 전사자가 있었다. 비의 전면 상단에는 창의하신 영령의 휘자와 서훈기록이요 하단에는 김상종대장의 격문이다. 좌면은 번역된 격문이고, 우면은 전투일지를 명기하였으니 여기에는 장활한 기록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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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68-2 사촌마을 앞 병신창의기적비를 찾아왔다.

병신창의기적비는 일본의 국권 침탈기도에 항거하며 1896년 2월에서 4월까지 의성 점곡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당시 의병들은 10차례의 전투 과정에서 27명이 사망했으며, 김상종 의병대장과 김수담 선봉장을 비롯한 7명의 순국선열이 1968년부터 2007년 사이 건국훈장 애족장과 건국포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丙申倡義紀績碑(병신창의기적비)
丙申倡義紀績碑(병신창의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