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53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抗日獨立運動紀念碑(항일독립운동기념비)를 建立(건립)하면서
조국광복과 주권회복을 위하여 민족의 자유 평등 박애정신을 살리는 구국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이 고장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얼을 받들어 그 위대한 업적과 공훈을 기리고 훌륭한 님들의 넋을 위무하면서 길이 후세에 전하여 드높은 애국 애족정신을 숭상하게 함이 우리 후예들의 의무이고 도리라는 깊은 생각에 정성태 이윤철 이길수 김하운 김정배 이광호 등은 뜻을 다함께 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하였고 이 기념비 건립에 정부당국과 의성군청 안동보훈지청 그리고 의성문화원과 안평면에서 협찬하였으며 또한 이에 물심양면으로 적극 힘써주신 분들의 고마운 마음 잊지 못하여 모두 여기에 기록하였고 아울러 지사님들의 자손록도 병기하여 둔다.
조국광복과 주권회복을 위하여 민족의 자유 평등 박애정신을 살리는 구국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이 고장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얼을 받들어 그 위대한 업적과 공훈을 기리고 훌륭한 님들의 넋을 위무하면서 길이 후세에 전하여 드높은 애국 애족정신을 숭상하게 함이 우리 후예들의 의무이고 도리라는 깊은 생각에 정성태 이윤철 이길수 김하운 김정배 이광호 등은 뜻을 다함께 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하였고 이 기념비 건립에 정부당국과 의성군청 안동보훈지청 그리고 의성문화원과 안평면에서 협찬하였으며 또한 이에 물심양면으로 적극 힘써주신 분들의 고마운 마음 잊지 못하여 모두 여기에 기록하였고 아울러 지사님들의 자손록도 병기하여 둔다.
抗日獨立運動紀念碑(항일독립운동기념비)
여기 이고장 의성은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인 조문국의 옛터전이오 신라와 고려 조선의 삼조를 거쳐오면서 찬란한 문화유산을 역사에 담아온 유서깊은 옛 부읍지요 지금도 8천여기의 크다란 고분군이 여러곳에 남아서 화려했던 지난날의 전통과 뿌리를 말해준다.
동북으로 뻗은 태백의 영맥이 높이 솟은 웅도 경북의 중심에 자리잡고 산자수명의 천연혜택을 누린 명승지요 이곳 충의열사가 고려왕조 창건에 이바지한 훈공으로 왕명은 의성을 부로 승격시킨 의로운 고장이다.
더우기 안평은 의성의 심장이요 수려한 응봉산의 정기와 의의 얼을 이어받아 정의감이 강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고 개화기에 일찌기 자각하여 기독교의 신앙으로 불의에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적 감화와 자유이념을 사랑하는 민족의 자주의식이 항일독립정신으로 승화되어 구국항일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의의 상징과 긍지를 살린 독립운동의 발원지이다.
을사매국5조약의 늑성과 경술국치를 당하여 우리 민족은 모두가 비분강개하였고 피밥박민족의 의분심은 기미년 3월 1일에 선포한 독립선언으로 2천만민족에게 생명력과 민족자결의식에 큰 용기를 부여하였다. 이곳 안평에 대사 쌍계 괴산 등의 장로교회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열망하고 강인한 항일사상의 선각자 권해운 이양준 이이경 박이량 김용학 김옥경 이종출 이호출 권사연 이봉수 지사가 포악한 침략자 일본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동
동북으로 뻗은 태백의 영맥이 높이 솟은 웅도 경북의 중심에 자리잡고 산자수명의 천연혜택을 누린 명승지요 이곳 충의열사가 고려왕조 창건에 이바지한 훈공으로 왕명은 의성을 부로 승격시킨 의로운 고장이다.
더우기 안평은 의성의 심장이요 수려한 응봉산의 정기와 의의 얼을 이어받아 정의감이 강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고 개화기에 일찌기 자각하여 기독교의 신앙으로 불의에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적 감화와 자유이념을 사랑하는 민족의 자주의식이 항일독립정신으로 승화되어 구국항일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의의 상징과 긍지를 살린 독립운동의 발원지이다.
을사매국5조약의 늑성과 경술국치를 당하여 우리 민족은 모두가 비분강개하였고 피밥박민족의 의분심은 기미년 3월 1일에 선포한 독립선언으로 2천만민족에게 생명력과 민족자결의식에 큰 용기를 부여하였다. 이곳 안평에 대사 쌍계 괴산 등의 장로교회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열망하고 강인한 항일사상의 선각자 권해운 이양준 이이경 박이량 김용학 김옥경 이종출 이호출 권사연 이봉수 지사가 포악한 침략자 일본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동
하였다. 괴산교회 김원휘조사는 3월 3일 평양의 대규모의 독립만세시위를 목격한 후 쌍계교회 박영화 목사에게 설명하고 함께 동지규합을 하였고 8일 서문시장의 격렬한 만세시위에 참가한 괴산교회 박우완 영수와 계성학교 박상동 이맹준 학생 등은 비안보통학교 학생들과 비안 안평의 기독교신도들을 설득하여 독립만세 시위거사를 확약하였고 12일 아침 비안보통학교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후 1시에 쌍계교회 뒷산에서 신도 학생 100여명이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13일은 비안우시장에서 16일에는 비안 2동 장춘동의 농민 100 여명이 만세시위를 하였고 대사교회의 이종출 김옥돌 영수 이양준 이호출 이이경 이만준 이맹준 이수원 배세태 정갑이 김길도 최상근 지사는 동민 100여명을 독려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오후 8시에는 마전동에서 기도동까지 횃불시위를 하였다. 17일 다시 대사(우리골) 괴산 마전동을 거처서 창길동 교회 신도세 농민 4백여명이 안평주재소 앞에 집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대 기세에 일인순사와 한인순사가 모두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이변도 생겼고 석탑의 권수백조사와 강희석 김복식 정영동이 주동한 30여명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봉양면 사부동에서 주민 100 여명도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19일 아침대사교회 중심인물 이양준 이이경 권해운 이봉수 지사의 지휘하에 도옥동 냇가에 집결한 안평면민 7백여명이 모두 각자 도시락 지참에 태극기와 곤봉을 가졌으나 시위대원들의 사기는 충천하여 그 기세는 전투태세로 돌변하여 도이원으로 향한 시위선발대에 독립을 열망하는 남녀노소가 가세하여 천수백명으로 증가하여 2십리나 뻗힌 이 항일독립만세 시위대는 노도처럼 밀어부쳐서 도이원주재소를 박살내었다. 의성경찰서로 향한 시위대의 동태에 대한 정보에 긴장한 왜경은 개시중인 도이원시장을 폐쇄하였으나 오후 1시반 경에는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에 참여한 인근 주민이 천여명은 넘었다. 도이원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는 절정을 이루었고 이에 백여명으로 증파 동원된 왜헌병과 경찰은 해산을 요구하며 무차별 발포하여 30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흥분한 시위대는 곤봉과 투석으로 맞서니 대혈전으로 급변하였는데 선봉에서 지휘한 이양준 이봉수 이이경 권해운 지사가 모두 총상을 입었으며 피검된 주동인물은 51명이며 그중 권해운 지사는 호송 도중 순국하였고 이양준 지사는 3년형을 받고 복역 6개월 만에 순국하였다. 안평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지사 이화실은 2년형 이종출 김옥돌 김치명은 1년 6월형 최순권은 1년 2월형 이봉수 이만준은 1년형 이맹준 이수원 이흔이는 10월형 영수 이원춘 이순근 정갑이 김익휘 김길도 정부석 배세태 정만업 정장수 최상근 지사는 6개월형 이이경 지사는 6월형의 옥고를 치렀은데
포악한 왜경들의 고문과 잔인한 태형을 모두가 용감하게 잘버티어 이겨내고 출옥하였으나 장독으로 순국한 지사와 그 후유증은 평생을 고통으로 신음하는 삶이었다. 광복후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열에 대한 응분의 건국훈장과 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곳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은 여러곳에 큰 영향 주어 많은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 일어나게 하였고 님들의 애국애족사상과 독립정신으로 항일운동을 실천케 한 숭고한 얼과 그 정기는 천추에 큰 빛 되어 청사에 길이 남아서 영세에 사표가 되었다. 나라와 겨레 위하는 구국의 길은 창든 야수들이 우글대는 살벌한 가시밭길인데 기어코 가야만할 길이기에 맨발로 뛰어든 님들은 신앙의 방패들고 싸워서 흘린 고귀한 선혈이 질척하게 스며든 이곳 성지에 나라꽃 곱게 피는 근화동산 만들어서 님들의 높은 애국혼 기리며 고달펐던 그 넋을 고이 잠들게 하소서
1996년 4월 18일
1996년 4월 18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532 마을 입구 도로변 안평항일독립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
항일독립운동기념비
응봉산의 정기가 서린 이 곳 우리골에서 여호와 닛시를 방패삼은 기독교인들의 선봉으로 일제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 함성이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앞세워 도리원 장터까지 진입한 700여명의 안평인들은 왜군의 무차별 총탄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절정적 항거로 목숨을 잃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불의에 대항한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민족의 얼을 먼 훗날까지 이어 받기 위하여 1996년 4월 이 자리에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2007. 12.
응봉산의 정기가 서린 이 곳 우리골에서 여호와 닛시를 방패삼은 기독교인들의 선봉으로 일제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 함성이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앞세워 도리원 장터까지 진입한 700여명의 안평인들은 왜군의 무차별 총탄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절정적 항거로 목숨을 잃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불의에 대항한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민족의 얼을 먼 훗날까지 이어 받기 위하여 1996년 4월 이 자리에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2007. 12.
抗日獨立運動紀念碑(항일독립운동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