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산4기미3.1독립만세운동시발지기념공원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늙은 천리마가 마판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리 밖에 있다는 싯귀가 있다. 이는 바로 조국광복을 위하여 피끓는 애국청년으로서 눈보라치는 북만주 벌판을 달리다가 적의 감옥에서 청춘을 불사르고 이제는 늙은 몸을 고향의 초라한 오막살이에 던져서 여생을 보내면서도 오직 조국통일과 민족번영을 목마르게 바라고 있는 애국지사 현호 박석홍 선생의 장한 뜻을 읊어 주는 듯하다. 선생은 이씨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질 무렵 이곳 의성군 비안면 서부동에서 출생하여 일찌기 휘문의숙을 마치고 1914년 19세 소년의 몸으로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김약수 동지와 중국 운남군 관학교를 찾아가다가 일본경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만주에서 동지를 규합하더니 1920년 북만조선인청년 총동맹을 조직하는 한편 잡지 「농군」「혈청년」등을 발간하여 청년동지의 무장봉기를 제창하였고 김좌진 장군이 영도하던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에서도 구국혁명의 필봉을 들었다.
그후 이백파 선생과 고려혁명군을 재조직하고 다시 단두단을 조직하여 서울에 있는 일본인 집단살해 계획을 세운 뒤 1928년 소련영토인 연해주 일대에서 망명동지들을 규합하다가 해참위 청진 함흥동 감옥에서 4년여의 옥고를 겪었다. 출옥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만주로 탈출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만주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옛 동지들은 찾을 길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고향에 돌아오니 때는 1935년이었다. 그로부터 국내 동지들과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8.15 해방 이튿날 의성경찰서에서 석방되기까지 20여회의 검거 투옥을 당했다.
해방후 대구치안유지회 생활부장 전국혁명자대회 의장 경북신문사장 및 주필 독립노농당 중앙당무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상국민의회 대의원 혁명동지총연맹 중앙지도 위원 백범 선생 살해진상규명 투쟁위원회 상임지도위원 독립노농당 당수등을 지내고 이젠 늙고 병든 몸을 고향집에 맡기고 있다.
해방후 대구치안유지회 생활부장 전국혁명자대회 의장 경북신문사장 및 주필 독립노농당 중앙당무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상국민의회 대의원 혁명동지총연맹 중앙지도 위원 백범 선생 살해진상규명 투쟁위원회 상임지도위원 독립노농당 당수등을 지내고 이젠 늙고 병든 몸을 고향집에 맡기고 있다.
선생의 이 빛나는 업적과 고귀한 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받들고자 후배동지들이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이 돌을 다듬어서 나에게 글을 청하는 것이다. 내 비록 그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의를 배우고자 하는 뜻을 지녔기에 붓끝을 다듬어서 대강 지나신 자취를 적고 다시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노니 나라 없었기에 집 또한 버렸노라 북만주 벌판에서 시베리아 감옥에서 청춘을 파묻어도 뜨거운 가슴에는 조국뿐 있었노라 이제는 마판에 엎드린 천리마 우리도 임을 배워 천리를 달리리라.
서기 1968년 12월 19일
서기 1968년 12월 19일
愛國志士 玄昊 朴錫洪 記念碑(애국지사 현호 박석홍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