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산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배중엽씨와 함께 주동이 되어 비안면 안평면 봉양면 교회와 연락하여 거면적으로 독립만세를 불러 군내에서 최대규모의 의거를 일으키셨다. 목사님은 동지 4인과 함께 의성경찰서에 자진출두하여 일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대구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루셨다. 강직하고 정의의 횃불인 배달근씨 고상하고 사회성이 풍부한 배중엽씨 청렴결백하고 꼿꼿한 박영달씨 의지적이고 지성인 박영신씨 이 4인은 서울형무소에서 1년 반씩 복역하셨다. 동참인 배도근 박 박세길 배용석 배용도 김명출 박상동 이종연 박인욱 제씨는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씩 복역 안평면 우리동 출신 권해운씨는 봉양면 주재소 습격시 왜경의 총탄에 순사 하셨다. 특히 청년대원으로서 박상동 배정경 최덕규는 동원과 국기만드는데 활동한 바 크다. 이 동안 박목사님이 애지중지 하시던 학교는 주인을 잃은 듯 하였으나 당시의 재무 정응순 씨가 정성을 다하여 경영을 계속하다 목사님이 출옥 후 경남 거제 5처 교회 위임 목사로 봉사하시다가 1923년 7월 24일 승천하시고 배달근 배중엽 박영달 박영신 제씨는 일생을 깨끗하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국민계몽에 진력하시다가 이젠 다 고인이 되셨다.
목사님의 2남 상동목사는 당시 대구형무소 6개월 복역 후 왜인의 끈덕진 감시로 인하여 서울 평양 일본의 나고야 오오사까 등지를 전전 전도 중 야마구찌 형무소에서 복역하시다가 조국광복과 더불어 환국 미군정청 재직시 쌍계국민학교 설립인가에 공이 크다. 이상 애국투사의 후손들이 경향각지에서 교육 종교 사업방면에 진출하여 국가에 봉사하고 있으니 의인의 자손은 일어난다는 옛말이 옳도다.
찬시 평생을 착하게 살다. 가난하게 돌아가신 님이여 지금은 어드메 계시는고
아직도 조국을 위하여 근심 걱정하시는가 나라와 겨레사랑 하나님과 이웃사랑
목사님의 2남 상동목사는 당시 대구형무소 6개월 복역 후 왜인의 끈덕진 감시로 인하여 서울 평양 일본의 나고야 오오사까 등지를 전전 전도 중 야마구찌 형무소에서 복역하시다가 조국광복과 더불어 환국 미군정청 재직시 쌍계국민학교 설립인가에 공이 크다. 이상 애국투사의 후손들이 경향각지에서 교육 종교 사업방면에 진출하여 국가에 봉사하고 있으니 의인의 자손은 일어난다는 옛말이 옳도다.
찬시 평생을 착하게 살다. 가난하게 돌아가신 님이여 지금은 어드메 계시는고
아직도 조국을 위하여 근심 걱정하시는가 나라와 겨레사랑 하나님과 이웃사랑
사랑은 타는 불이라 봉화들고 앞장설 때 백절불굴하는 정진 산천이 떨었노라
임가신 반세기에 독립은 찾았건만 국토는 양단된 체 통일의 날 기약없네
아! 아! 님은 하나님의 앞에 이 기원을 전해주오.
1969년 3월 일
한솔 이효상 지음 / 아주 신병호 씀 / 3.1독립투사 기념사업회 세움
임가신 반세기에 독립은 찾았건만 국토는 양단된 체 통일의 날 기약없네
아! 아! 님은 하나님의 앞에 이 기원을 전해주오.
1969년 3월 일
한솔 이효상 지음 / 아주 신병호 씀 / 3.1독립투사 기념사업회 세움
3.1독립투사기념비
3.1독립운동 유공자 박영화 배달근 배중엽 박영신 제씨는 향토가 낳은 애국투사로서 영원히 기념할 분들이다. 박영화 목사님은 자질이 영민준수 진리를 찾는데 열렬하여 깨달은 바 있어 1906년 전 가족이 기독교에 입교 하셨고 국제정세를 통찰하신 목사님은 조국의 자주독립의 기틀을 닦기 위하여 1910년 향리인 쌍계동에 사립기독 정림학교를 설립하여 영재육성에 진력하셨다. 목사님은 뜻한 바 있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시어 1918년 6월 10일 졸업하여 목사가 되시어 교육과 전도사업에 봉사하시던 중 이듬해인 1919년 기미 3.1운동이 발발하여 흔천등지 하였던 것이다. 당시 밀령을 받고 하향하신 목사님은 각지에 연락망을 펴고 아우 영달 영신 동지 배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