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 산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밀파하였다. 이들은 대구 밀양 양산등지에 본거를 두고 영남일대를 무대로 모금활동을 전개하니 공은 홍종락 양한위 권충락 이재술 김종만 권정락등과 함께 달성 영천 청도등지에서 활약중 홍종락이 1922년 1월에 대구에서 이재술 김우창이 5월에 군위에서 왜경에 피체되었으나 공은 남은 동지들과 삼엄한 경찰망을 뚫고 계속 활동하여 다액의 자재와 타재를 조달 송금하였다. 공은 누대 주손으로 상봉하솔하는 처지임으로 혈육지친에까지 비밀을 고수하고 가산을 탕진하면서 갖은 역경과 구난을 무릅쓰고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을 줄기차게 계속하였으나 동지들은 연이어 피체투옥되고 수사망은 더국 위축되니 끝내 이루지 못한 한을 품고 비장한 결의를 하고 조용히 순절하였으니 공의 업적과 정신은 우리독립운동사에 별로서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것이다. 공의 초휘는 재수요 자는 치실이요 묘는 학미산 선영하 유좌원이다. 계의 신라왕자 달성대군의 후로 려조예부상서 휘 선이 함양군에 수봉되었으니 이분이 함양박씨의 1세조이다. 용래로 충의현관과 대를 이었고 17대조 휘 성양 호 금은 선생은 포은선생의 고제로서 조선개국초 왜구정벌에 위훈을 세웠고 관이 이조참판 증 이조판서로 시는 정헌이니 명금서원에 존향되었다. 13대조 휘 승 호 학천은 수의부위로 분종의 조이시다. 고조 휘 돈길은 증 좌승지요 증조 휘 문달은 증 이조참판이요 조 휘 정운은 수순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이요 고 휘 세환 호 이산은 이만포 곽면우 장회당 제 선생의 문에 사사하여 문집 10권을 남긴 거유이시다. 비는부림홍씨 건우의 따님으로 규덕이 높았다. 배는 부림홍씨 규수의 따님으로 현완해서 부공몰후 47년간에 시봉양지로 일관하고 가세 복고에 喫苦(끽고)하다가 1974년 갑인7월 17일에 졸하니 묘는 만석산 묘좌 ..후략..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 산 81 애국지사 박재화의 묘를 찾았다.
산 입구에 오자 멀리 묘비가 보였다.
제3553호 / 훈장증 / 고. 박재화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9년 8월 15일 / 대통령 김대중
국무총리 김종필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록함 행정자치부장관 김기재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9년 8월 15일 / 대통령 김대중
국무총리 김종필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록함 행정자치부장관 김기재
제3553호 / 훈장증 / 고. 박재화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9년 8월 15일 / 대통령 김대중
국무총리 김종필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록함 행정자치부장관 김기재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99년 8월 15일 / 대통령 김대중
국무총리 김종필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록함 행정자치부장관 김기재
하늘의 뜻이 무심하지 아니하여 50여년의 세월이 지나 공의 고귀한 뜻이 세상에 알려져 그 기록을 찾아 향리에서 의사로 추존하여 수갈하셨고 다시 10여년이 지나며 조국 광복의 업적이 국가가 인정하여 기묘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부모형제 불목하고 가사 불고하시던 구국일념의 거룩한 뜻이 이제야 백일하에 밝혀졌습니다. 공이여 장하도다. 이 고귀한 뜻은 만인의 표상이요 후손의 귀감이 될것이며 생전의 뜻이 지금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이 정신을 천추에 전하고자 돌에 새겨 묘전에 바치오니 이제 만시름 거두시고 저승에서나마 영세토록 평안하옵소서.
1999년 11월 일 족제 재홍 근식 손 연하 근립
1999년 11월 일 족제 재홍 근식 손 연하 근립
處士 咸陽朴公 諱 在秀 之墓(처사 함양박공 휘 재수 지묘)
義士 咸陽朴公 諱 在華 之墓(의사 함양박공 휘 재화지묘)
義士 咸陽朴公 諱 在華 之墓(의사 함양박공 휘 재화지묘)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 점철된 허다한 수난 중에서 일제의 침략이 가장 혹심하였다. 그 참담한 암흑과 질곡 속에서 망국의 비운에 통분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혹은 국내에서 혹은 국외에서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쳤으니 여기 함양박공 휘 재화가 바로 그 가운데 한 분 이시다. 서기 1889년 을축 11월 18일에 군위군 부계면 화리 우제에서 탄생하여 1918년 술진 8월 초 2일 의성군 금학미동 구고재에서 순절하시기까지 40 생애 중 그 태반을 오직 항일투쟁에 몸바치셨다. 공은 천성이 침중하고 의표가 정영하여 조년에 이미 사략통감에 통달하여 치란흥망의 이치를 터득하고 학문의 대성이 촉망되었으나 뜻밖에 경술국치를 당함에 망국의 한에 사모쳐 바칠 뜻을 굳쳤다. 때마침 만주 간도에서 망명 애국지사들이 조직한 북로군정서 부속 흥업단원들이 독립운동 자금 조달 목적으로 1921년 말에 이만준 김인제 등을 국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