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화 기적비

4

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5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문이 잠겨있다. 주민에게 경위를 설명하자 다른 골목에 있는 옆집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알려주신다.
옆집인 景鶴齋(경학재)
晩鑑亭(만감정)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가운데 晩鑑亭(만감정)이라는 편액과 좌우에 재실의 편액이 걸려있다.
義士 咸陽朴公 紀蹟碑(의사 함양박공 기적비)
義士 咸陽朴公 紀蹟碑(의사 함양박공 기적비)
옛부터 국가가 위난에 처하였을때는 충신의열의 붉은피와 의로운 혼이 등불되어 민족의 나아갈길을 밝혔다. 이로써 윤강을 바로잡아 국맥을 이었고 민족정기 찬연히 빛냈으니 그 유풍여열이 세도인심에 끼친 바 크다할 것이다. 아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보호한다하고 주권을 강탈한 1905년 을사에서 1945년 을유 조국광복에 이르기까지 장장 41년동안 삼천리 강토는 腥風(성풍)이 몰아치고 혈우에 젖지 않은 날이 없어 생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하늘에 닿을듯한 그들의 폭악은 이 땅을 둘러싸서 함정과 덫을 만들어 놓고 태산같은 압력으로 억눌러 실오리만한 틈도 용납되지않았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 민족의 울분은 폭발되어 1919년 을미에 3.1독립문세로 항적의 봉화 드높이 올려져 적의 간담을 찢었지만 이로써 잔학한 그들의 총칼아래 민중이 뿌린 선혈은 산하를 붉게 물드렸다. 장열할사 의열들의 그 모진 의지여! 이미 抵死抗賊(저사항적)을 하늘에 별세한 그들의 기개는 열화처럼 뜨거워져서 독립이냐 죽음이냐의 양자택일의 결의를 굳히고 그 항쟁의 전열은 해내외로 번져만갔다. 이 혈맹의 선열속에 여기 박재화공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공의 일명은 재수요 자는 치실이다. 관은 함양이
다. 1889년 11월 18일에 군위군 부계면 신리동 만제에서 출생하였다. 생계는 조선조 개국초에 왜구정벌로 무훈을 세운 휘 성양은 포은선생의 고제로서 호는 금은이오 관 이조참판 시는 정헌이니 공의 17조 이시다. 이 뒤로 문장덕업과 현관음직이 세대로 이어져 왔고 고 휘 세환 호 이산은 학행이 높은 거유로서 양도내의 존앙을 받았다. 비는 부림홍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영매하고 뜻이 강개하였다. 일찍 사기를 읽을때 충신열사의 전에 이르러서는 비분허희함을 거듭하였다. 1910년 경술의 국치를 당하자 망국의 슬픔에 사모쳐 조국독립을 성취코자 항일전선에 신명을 바칠뜻을 굳혔다. 때에 만주 간도에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조직체인 북로군정서 부속 흥업단원들이들이 독립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1921년말에 이만준 전인제등을 국내에 밀파하였다. 이들은 대구 밀양산 등지에 거점을 두고 공을 비롯하여 손기성 권충락 이재술 김연환 최명해 심상욱 박사림 정락산 손재헌 손원헌 우홍기 박수의 권정락 홍종락 김종만 양한위등 동지를 규합하여 영남일대를 무대로 삼아 모금운동을 전개하니 공은 홍종락 이재술 양한위 권충락 김종만 권정락과 함께 달성 영천 청도 등지에서 암약하던중 다음해 1울에 홍종락이 대구에서 이어서 이재술 김우창이 군위에서 차례로 피체되었으나 공은 이에 좌절되지 않고 남은 동지들과 함께 왜경의 핏발선 감시망을 뚫고 계속 활약하여 다액의 자재와 모금한 돈을 본부로 비송하였다. 공은 상봉하솔한 처지로 가산을 탕진하니 향내에서까지 방탕인으로 오인을 받았으나 공은 가슴깊이 간직한 비밀만은 비록 부모형제간에도 누설치 않았다 마치 주군의 복수를 위하야 훼형위장하고 다리밑에서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예양의의 자학에 비할까 다만 공의 복수토적의 일념은 십재 풍상속에 더욱 걷어만 갔다. 그러나 하늘은 잔인해서 공이 설 땅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지들은 연달아 피체되고 경찰망은 압축되어만 갔다. 사건의 관건을 잡은 공이 피검되면 일이 더욱 악화될것을 우려한 공은 비장한 결의를 하고 1928년 8월 2일 의성군 금성면 학미동 구고동에서 천고의 한을 품고 순의하였으니 때에 나이 40세였다. 나라 원수 갚지 못하고 부모께 종양의 효를 다못드린 공의 울
분한 원혼은 구원에서도 원수를 무찌르겠다는 장열한 뜻 잊지 않았으리라. 공의 일생은 비록 짧았으나 그 영명은 영원하리라 항적의 의분앞에 사생도 홍모였고 일념은 광복이었으니 어찌 높고 장하지 않으랴. 그러나 공의 행적이 오래동안 민멸되었다가 현회가 유수하여 이제 백일하에 천양되니 재천하신 영령이신들 어찌 기쁘지 않으랴 이제 향토의 뜻있는 인사와 이산선생을 우모하는 보인계원들이 공의 행적을 돌에 새겨 길이 기념코자할세 영유 두석형이 혈루를 삼키며 挽留(만유)하나 이미 발론된 공의가 어찌 이로써 중단되랴. 보인계원 박춘국 신달섭 이시만 유시순 김인수가 나에게 비문을 요속하기로 불문이나 평소 공의 풍절을 흠모하던바이라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짓기로 하다.
의성군 금성면 대리1리에 있는 함양박씨 정자 만감정 내에 있는 의사 박재화 기적비를 찾았다.
만감정의 사진 모습만 알고 정확한 주소는 모른다.
로드뷰를 통하여 예상되는 곳을 찾아왔다. 내부에 비석도 보인다.
GPS 상의 주소는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55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