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직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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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016-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耕山 李泰稙 先生 紀念碑(경산 이태직 선생 기념비)
耕山 李泰稙 先生 紀念碑(경산 이태직 선생 기념비)
사람은 죽은 뒤에 이름이 남겨지고 송백은 추워져야 절개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창국이후 외적의 침략을 받은 바 한두 차례 아니었으되 구한말기에 일제에게 강토와 민족을 송두리째 뺴았긴 것과 같은 불행은 5000년 역사에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후록세신으로 나라와 겨레를 넘겨 주고 일제의 벼슬을 받아 일신의 영화에 급급한 매국노가 득실거리는 속에서 위험과 박해를 무릅쓰고 불타는 국국일념으로 혹은 말과 글로써 늑약의 폐기를 부르짖고 혹은 의병을 모아 총검으로 싸운 의로운 지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여기 몸을 바쳐 불의와 싸우신 한 선열이 있으니 그는 의성군 금성면 산울동에서 영천이씨의 후예로 태어난 경산 이태직
선생이시다. 초야에 묻힌 28세의 약관으로 을사늑약에 공분의 용솟음을 억누를 길없어 그날 서울로 올라가 월남 이상재옹과 늑약의 폐기책을 꾀하다가 일경에 잡히어 옥고를 겪었고 경술국치를 당해서 일황에게 합병을 취소하고 국교를 복구하라는 내용의 장서를 보내려다가 또다시 일경에 잡혀 무한한 고초를 치뤘다. 선생이 일경에 잡혀갈 때 모부인으로 부터 "어미때문에 뜻을 변ㅎ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은 바 있고 옥고중에 군민은 물론이고 시중의 부녀자들로부터도 매일 끊임없이 격려와 사식 공궤를 받아 왔으니 이는 모부인의 가르침을 체득한 선생의 의열이 이들을 감화ㅎ게 한 것이라 선생은 마침내 동지 일송 김동삼선생과 중국으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일경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성산하에서 옥고의 지침과 울분
의 병으로 1913년 계축 10월 5일에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었다.
선생은 비록 가시었으나 넋은 길이 살아서 나라와 겨레를 지킬 것이며 광복된 조국의 하늘끝에 선생을 추모하는 지사들의 정성어린 기념비가 서게 되었으니 이제 선생의 거룩한 자취와 꽃다운 이름은 이 땅이 겨레와 더불어 길이 빛나리라.
산운생태공원에서 멀지 않은 금성면 산운리 1016-12 솔끝숲공원
이곳에 경산 이태직 선생의 기념비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告同胞(고동포) [동포에게 고함] - 耕山 李泰稙(경산 이태직)

黑雲滿地移時日(흑운만지이시일) 검은 무리 땅에 가득 세월은 흘러 가네
烈火燃金到夜灰(열화연금도야회) 쇠를 녹인 모진 불도 밤 지나면 재가 되리
早晩天心吾未識(조만천심오미식) 언제일까 하늘의 뜻 내 어이 알랴마는
同胞應見好風來(동포응견호풍래) 응당히 우리겨레 좋은 시절 맞으리라
圃老之橋桂老堂(포노지교계노당) 포은선생 선죽교와 민충정공 혈죽당은
遙遙前後對雙芳(요요전후대쌍방) 세월 앞뒤 멀고 머나 충의정신 같을지니
若今奸賊臨斯見(약금간적임사견) 만약에 원수놈들 이곳에 와서 보면
肉顫魂飛肝膽霜(육전혼비간담상) 살 떨리고 혼은 날고 간담마저 서늘하리
耕山 李泰稙 先生 紀念碑(경산 이태직 선생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