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집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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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장리 14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성군 가음면 장리 145 순국열사 구성집 선생 추모비를 찾았다.
惺川齋(성천재)
순국열사 구성집 선생 추모비
관리번호 : 31-1-77 / 관리자 : 능성구씨 덕천문중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추모비는 순국열사 구성집(具聖執)(1874~1909)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17년에 세워졌다. 선생께서는 경북 의성군 가음면 장리(덕천)에서 성천공(惺川公) 구건종(具建宗)의 후예로 태어났다.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선생께서는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투신하였다. 이듬해에 김동산(金東山) 의병진에서 활약하였으며, 1907년에는 성익현(成益賢) 의병진에서 화승총(火繩銃)으로 무장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한 울진 죽변 해안을 침범한 일본 선박을 공격하여 3인을 사살하였다. 이해 8월에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제(日帝)에 피체(被逮)되어 교수형을 언도받아 순국하였다. 나라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2018년에는 이 추모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殉國烈士 具聖執 先生 追慕碑(순국열사 구성집 선생 추모비)
殉國烈士 具聖執 先生 追慕碑(순국열사 구성집 선생 추모비)
조선이 개국한지 500여년 국사(國事)가 문란하고 열강(列强)이 침략하여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을 때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 연이어 일어났으니 선생이 그 가운데 한분이시다. 선생의 성(性)은 구씨(具氏)요 휘(諱)는 성집(聖執)이다. 보명(譜名)은 연청(然聖)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1874년 고종(高宗) 11년에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가음면(佳音面) 덕천리(德川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정의심(正義心)이 강하였으며 기개(氣槪)가 있었다. 성장함에 학업에 충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어른을 공경하였다. 1905년 일제(日帝)가 강압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고 조선을 강점하려고 획책하자 선생은 붓을 던지고 분연히 일어나 의병(義兵)에 투신하였다. 이듬해 김동산(金東山) 의병진(義兵陣)에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경북 봉화군과 강원도 삼척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07년 융희(隆熙) 1년 7월에는 성익현(成益賢) 의병진에서 화승총(火繩銃)
으로 무장하고 동지 200여 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에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삼척군 죽변동 해안을 침범한 일본 선박을 공격하여 3인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동년 8월에 울진군 석호리와 삼척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1908년 10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에서 교수형(絞首刑)을 언도(言渡)받고 공소(公訴)하였으나 1909년 2월 2일에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과 동년 2월 17일에 대심원(大審院)에서 기각(棄却)되어 34세를 순국(殉國)하였다. 후사(後嗣)는 전하지 아니한다. 1991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훈장(建國勳章) 애국장(愛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선생의 선계(先系)는 고려(高麗)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휘(諱) 존유(存裕)를 시조로 하며 7세조(世祖) 문절공(文節公) 송은선생(松隱先生) 휘(諱) 홍(鴻)은 고려의 사직(社稷)이 다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킨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분이시다. 경상도 의성의 입향조는 9세조 의성군사공(義城郡事公) 휘(諱) 익령(益齡)이며 10세조 휘(諱) 장손(長孫)은 별시위(別侍衛)이다. 12세조 성천공(惺川公) 휘(諱) 건종(建宗)이 동면(同面)의 덕천(德川) 장리(長里)로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세거(世居)하였으니 선생의 12대 조이다. 부친은 휘(諱) 예조(禮祖)이고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2015년에 성천공의 중형(仲兄) 진사공(進士公) 휘(諱) 찬종(纘宗)의 후손 포두문중(浦頭門中) 자원(滋源) 종인(宗人)이 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와 국가기록원(國家記錄院)에서 선생의 공적과 재판기록을 찾아 덕천문중 구진(具鎭) 회장께 전하였다. 이에 선생의 순국정신(殉國精神)을 기리기 위하여 문중에서 모금하고 경북북부보훈지청(慶北北部報勳支廳)과 협의하고 의성군(義城郡)의 지원을 받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명(銘)을 하여 추모합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을 때 구국(救國)의 일념(一念)으로 의병(義兵)에 투신하였네. 두 의병장과 더불어 군무(軍務)를 논하고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였네. 사세(事勢)가 불리하여 일제(日帝)에 피체(被逮)되어 꽃다운 나
이에 순국(殉國)하셨네. 일제(日帝)가 패망(敗亡)하고 조국이 광복(光復)되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이 건국되었네. 나라에서 공훈을 기리어 훈장을 추서하고 애국정신을 기렸네. 입향조 성천공(惺川公)의 재실(齋室) 경내(境內)에 추모비를 건립하오니 편히 영면(永眠)하옵소서. 방손(傍孫)이 옷깃을 여미고 추모비(追慕碑) 글을 지으니 비봉산(飛鳳山)이 에워싼 고향 덕천(德川)이 빛나옵니다. 후인들이여 선생의 애국정신을 거울삼아 자유대한(自由大韓) 나라사랑하세.
서기 2017년 정유 5월 방후손 철학박사 구본욱 근찬 / 제자 전주 이종훈 근서 / 건립추진위원장 구진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