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봉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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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산80-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근전 김재봉 선생의 삶

1891년 5월 19일 오미마을 참봉댁 장손으로 출생
1897년 삼종조부 운제공에게서 가학 계승
1907년 진양정씨 정재황과 결혼
1911년 서울 중동학교에서 수학
1914년 경성공업전습소 졸업
1917년 귀향하여 구국교육운동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지원활동 만주일보기자
1920년 노동운동 시작. 조선독립사건으로 피검
1921년 6월형 언도받아 복역하고 9월 출옥
1921년 조선노동대회의 극동민족대회 참가대표로 피선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며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 밝힘. 치타에서 교육활동, 사회주의 학습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참석. 블라디보스톡 해삼위 청년회 대표
1923년 5월 꼬르뷰로 내지부건설목적 귀국. 7월 신사상여구회 가입. 8월 꼬르뷰로내지부 조직 및 주도
1924년 조선일보 기자(~1925.8) 10월 정재달 사건으로 일시 검거됨. 11월 화요회 결성
1925년 4월 독립투쟁을 위한 결사체를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로 선임됨. 12월 신의주경찰서에 피검
1926년 7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됨
1928년 2월 검거 후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6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주로 독방 수감생활
1931년 11월 18일 만기출옥.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 요양하며 생활
1944년 3월 22일(음 2월 28일) 별세
2005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추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친 근전 김재봉 선생은 1891년 풍산김씨 오미동 참봉댁 장손으로 태어나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생애를 마칠 때까지 국가를 되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조선독립단 사건으로 첫 번째 옥고를 치른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으로 민족을 구하려 하였다. 신사상연구회에 참여하고 특히 화요회를 주도하면서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결사체의 필요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추대된 선생은 사회주의 이론을 민족문제 해결의 적절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실천에 옮겼다. 1925년 검거된 선생은 6년 옥고의 대부분을 독방에서 혹독하게 치르고 출옥한 뒤 쇠약한 몸으로 일제에 맞섰으나 안타깝게도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2월(음) 서거하였으며 2005년 우리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생가 앞 어록비의 '조선 독립을 목적하고'라는 글은 선생이 1922년 겨울, 동토의 땅을 밟아 이역만리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며 제출한 문서에 담긴 자필이며 이는 일제 강점기 독립 쟁취를 위한 사회주의 운동의 목적과 지향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 2008년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손자들이 안동대 교수 김희곤 쓴 글로 삼가 세우다.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산 80-3 항일애국지사 근전 김재봉 선생 묘를 찾았다.
근전 선생의 묘소 직산리 산 80-3과 김지현 선생의 묘소 직산리 132번지는 바로 붙어 있는 것이 위성사진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10미터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수풀이 우거져서 이동시간이 10분 가까이 걸렸다.
항일애국지사 근전 풍산 김공 재봉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