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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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흥천리 산17-1
탐방로그
예천군 풍양면 흥천리 산17-1에 위치한 김창희 선생 묘소를 찾았다. 김창희 선생 묘소 옆엔 김창희 선생 공적비가 함께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예천군 풍양면 흥천리 산 17-1 묘소 입구 독립유공 애국지사 김창희 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독립유공 애국지사 김창희 선생 묘소 300m
독립유공 애국지사 김창희 선생 공적비
이 비는 독립유공애국지사 김창희 선생 공적비이다. 선생의 본관은 순천이고 그 선계는 시조가 휘 총이시고 신라 47대 헌안왕때 종성이시다. 의정부 좌의정을 지내시고 시호가 양경공이신 휘 승주의 20대손이신 선생은 휘 수용의 3남으로 1906년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출생하시었다. 중국 만주에서 독립군자금을 제공하였던 부친의 애국정신과 웅지를 이어받은 선생은 22세때 봉화에서 여러 동지를 규합하여 봉화청년동맹을 결성하고 문화교양부장 조직연락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서기 1929년부터 1930년에는 신간회봉화지회상무간
사와 대표회원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왜정만행을 성토하였고 서기 1932년에는 영주 봉화 지역의 적색 농민조합활동으로 왜경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미결수로 혹독한 고문과 참형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고 이듬해 12월 22일에 2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셨다. 출옥한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니 예비검속 등 험한 길을 수 없이 걸었다. 선생같은 애국선열의 피어린 희생의 결과로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이 가능하였다. 다음해인 서기 1946년 3월 19일 40세를 일기로 아깝게도 타계하시다. 아! 이 비보가 전해지자 동지 지인 유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만장이 숲을 이루어 슬픔을 애도하였다. 선생의 공적이 하늘도 무심치 않아 선생이 작고한지 62년이 지난 작금에 공적자료가 발견되어 2008년 3.1절 기념식 석상에서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는 일이 곧 나라를 지키고 민족정기를 이어가는 것이므로 이 비를 세워 영원히 기념하고자 한다.
서기 2009년 5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