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영 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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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38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근세 발전과정에서 낙후된 우리 사회에 20세기를 전후하여 일부 선각자들이 현대문명을 지향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계몽의 한 까닭 서광은 어두운 장막에 싸였던 우리 고장에도 비추어져 서기 1921년에 유일한 현대식 교육기관인 영신의숙이 이곳 우망동에 창설되고 유근영 선생이 25세의 약관으로 훈육교사로 초빙되어 생애의 정열을 교육에 기울였다. 선생의 호는 지운이고 1898년에 세거지인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일산리에서 진주유씨의 유가명문에서 출생하였다. 온건독실한 성품과 중후하고 절도있는 언동은 군자의 풍모를 갖추어 품격있
는 교육자로서 또한 성실한 인간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교사로는 낙빙정이 사용되었으나 시설은 태무하고 재정은 빈궁하였으며 선생의 사생활은 극히 궁핍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시종일관 임기처변하여 갖은 고난과 풍상을 극복하면서 수십년에 긍하여 수많은 자녀를 훈육하여 전진을 밝혀주었다. 선생이 아니고서 그 누가 이를 감당하였으리오. 선생과 영신의숙은 숙명적인 인연이었다. 선생의 덕성과 식견은 이 고장 일반 인사계몽에도 영향이 지대하여 지역사회 근대화에 역군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선생의 젊으과 반생을 바친 영신의숙이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1943년에 막을 내라지 선생은 풍천 대창학교와 우망국민학교에서 자녀교육에 여생을 기울이고 1949년 6월에 우망일우에서 서거하니 중인 애도리에 우운산 동록에 예장되었으며 유족으로 초배 반남박씨는 무사하고 후배 안동권씨와 사자 내형이있다. 세사는 덧없어 선생이 가신지도 어언 이십유여 성상 고색 짙은 낙빈정사에는 예나 다름없이 백운이 유유히 오가며 고사를 회상케 한다. 인생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아 전하는 것 선생의 불후의 공적은 길이 빛나리라. 이에 선생을 추모하는 문생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공로를 기리며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80년 9월 16일 전 국회의원 문생 정진동 근찬
이 비는 정진기씨 주도에 의하여 정원하 정재기 손태원 정진탁 정철모 정원철 안영수 정재기 윤종옥 김영걸 등 제씨의 협조와 경향각지 여러분의 호응으로 수립하였음을 부기한다.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387-1 마을회관 옆 지운 유근영 선생 숭모비를 찾아왔다.
유근영 선생님의 숭모비는 일제강점기 1921년 이곳 낙빈정에 창설한 영신의숙(사설 작은 학교)에서 25세의 약관으로 궁핍한 사생활을 마다않고 젊은이들을 지도하시다가 1943년 영신의숙이 문을 닫자 예천 대창학교와 해방후 풍양 동부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시던 중 1949년 향년 51세로 타관에서 생을 마치신 분으로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로 옛 우망초등학교 입구 잡초밭에 방치되어있어 이곳으로 옮겨 오래도록 보존코져 합니다.
추록 : 1919년 고향에서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른 후(피신차 우망에 머물렀음) 위 사실로 1992년 광복절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유족으로는 래홍, 해희, 래형 삼남매가 있습니다.
2014년 7월 우망리 회관 신축 추진위원회
芝雲 柳近永 先生 崇慕碑(지운 유근영 선생 숭모비)
芝雲 柳近永 先生 崇慕碑(지운 유근영 선생 숭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