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세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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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산 162-1
탐방로그
삼충단은 운악산 현등사 입구에 있으며, 1910년 가평의 유림들이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3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좌측에는 최익현 추모비, 중앙에는 조병세 추모비, 우측에는 민영환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1989년 복원하여 매년 11월 25일 정오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으며, 계단을 오른 후 좌측을 보면 삼충단 복원기념비를 볼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殉國烈士 趙秉世 先生 追慕碑(순국열사 조병세 선생 추모비)
철종 때의 문신. 본관은 양주 자는 치현, 호는 산재라. 철종 10년 문과에 급제 단기 4207년에 함경도 암행어사, 단기 4221년에 예조, 이조판서, 이어서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에 중추원 좌의장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가평에 은거하시다가 단기 4233년에 다시 입궐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건의를 하였고, 을사조약을 폐기하라고 민영환 외 백관과 함께 수일간 궁궐 밖에서 연좌상소를 하다가 일본군에게 연금당했다. 다시 풀려나서 대한문 밖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보호조약 폐기를 주장하다가 뜻을 못이루자 표훈원에 되돌아가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셨다. 시호는 충정공 단기 4296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三忠壇 復元紀念碑(삼충단 복원기념비)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중국과 소비에트 그리고 일본등의 강대국에 둘려싸여 빈번한 시달림과 부대낌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보전하고 강토를 지켜올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목숨을 홍모에 붙이고 겨레와 나라를 위하여 신명을 다하신 애국열사들의 공덕에 힘입음이 아니겠는가? 이 비는 일제침략의 마수 가운데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할 생각으로 을사오조약을 맺기에 이르자 이를 막기위하여 궐내에서 조약폐기를 주장하며 금식투쟁을 벌이시던 열사와 의병을 일으키어 왜구와 싸우시다 체포되신 열사들께서 대세를 회복하기에 어려움을 확인하시고 혹은 음독으로 혹은 자인으로 혹은 자진으로 순국산화하신 세분 산재 조병세선생 면암 최익현선생 계정 민영환선생의 애국충정을 기리고 그 의거를 길이 후세에 전하기위하여 세분열사의 은둔과 회동의 유서지인 이곳에 세운것이다. 산재 조병세선생은 1827년에 나셨으며 중추의장과 의정부 우의정을 지내시었고 갑오경장이후에는 가평에 은거하여 계시었다. 1905년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자 이의 폐기를 주장하시며 민영환선생및 심상훈선생고가 함께 궐내에서 투쟁하시다가 대세 이미 기울었음을 아시고 표훈원에서 음독자살하셨으니 선생의 본관은 양주이시요 자는 치현이시며 호는 산재이시요 시는 충정이시다. 면암 최익현선생은 1833년 포천에서 나셨으며 동부승지로 계실때에 흥선대원군이 만동묘를 복구하고 서원을 폐지하는 시책에 극렬히 반대하시다가 제주에 유배되시었다. 대원군의 실각후 1894년에 공조판서로 기용되시었으나 1905년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자 제자인 임병찬과 남도에서 의병을 일으키어 왜구와 싸우시다가 이듬해 체포되시어 대마도로 유배되시었다. 대마도에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늙은 몸으로 어찌 월수의 밥을 먹고 살겠느냐! 너희나 살아돌아가서 나라를 구하여라" 하시며 일체의 곡기를 끊으시고 도리어 적지에서 자진순국하셨다. 선생의 본관은 경주시요 자는 찬겸이시며 호는 면암이시다. 계정 민영환선생은 1861년에 나셨으며 미국 공사를 시발로 외교활동을 벌이시어 "니콜라이 2세 러시아황제 대관식에도 참석하셨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양복차용의 효시이기도 하시다. 군부대신으로 계시면서 미국 독일 불란서 오지리등 각국을 순회하심으로 국제사정과 신문명에 밝으시었다. 시종무관으로 계실때 을사오조약이 체결되니 조병세선생및 심상훈선생과 함께 궐내에서 조약폐기를 주장하시다가 대세의 만회가 불가능함을 아시고 동년 11월 4일 국민과 각국공사앞으로 유서를 쓰시고 장렬하게 자인하셨다. 선생의 본관은 여흥이시요 자는 문약이시며 호는 계정이시요 시는 충정이시니 산재선생
의 시호와 같으시다. 원래 가평에 사시던 내시부 지사 나세환 첨지 김두환 유학 유방렬, 권덕용, 정기찬, 정기헌, 정인하, 이장재, 이복재, 이규재, 신일우, 왕명식등 여러분과 현등사 주지 정금면등 모두 열세분의 유지께서 뜻을 모아 3열사의 휘자를 새긴 자그마한 돌을 제우고 단을 모아서 해마다 두차례 음력 대보름날과 9월 9일에 간소한 차례를 올려오면서 이름하여 삼충단이라 하였다. 그 뒤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야간제향으로 옮겼으나 이른바 만주사변후로는 절사되었을뿐 아니라 단마져 허물어지고 겨우 그 흔적만을 남기게 되었다. 이를 송구하게 생각한 유지39명이 뜻을 모아서 삼충단복구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활동하는 한편 장관순님의 부지제공을 얻고 이현직군수님의 특별찬조를 얻어 여기 삼충단의 복원을 보기에 이르른것이다.
삼충단은 운악산 현등사 입구에 있다.
현등사 삼충단은 1910년 가평유림들이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3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삼충단 / 가평군 하면 하판리 488-1

이 삼충단은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선생 세 분 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서기 1905년 일제는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드디어 국권마저 침탈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당시 조병세 선생은 의정대신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이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처단하고 하루속히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으나 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고 최익현 선생은 을미의병운동의 태두였는데 소위 오조약의 체결을 보고 통분하여 다시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구금 되었으나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순국한 충신이다. 민영환 선생은 시종무관이었는데, 을사조약을 보고 대한문 앞에 나가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 이 삼충단은 일제 치하이던 1910년에 설단되었으며 1989년에 복원하고 매년 11월 25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