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52-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원과 죽고서원에 배향되었다. 증손 휘 탁 자는 언수로 증 공조참의이다. 신례리(대죽리)로 래거하여 500년 세거에 입향조이다. 휘 희증을 낳으니 증 호조참판인데 장방으로 향년 33세로 애석하게 요절하였다. 형제를 낳으니 장에는 휘 순으로 사재감검정이다. 차에 휘 섭이 현달하여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대 전과를 올리고 중훈대부 자예원사평에 제수되었고 죽고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후 7세에 내려와서 휘 한의 자는 백고이고 호는 낙파이. 문학이 맑고 아름다워 추중을 받았다. 가상과 유고가 있다. 많은 문행과 행장이 있었다. 그 증손 휘 형동 자는 맹임이고 호는 낙헌이다. 신망과 도량이 넓어 향리에서 모두 추존하였다.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석동이요. 자는 성원이고 문행이 잇다. 조의 휘는 대현이고 자는 사행이며 호는 죽하이다. 전원 유도헌의 문인이다. 형제를 낳으니 장방에 휘 종한이요. 차에 휘 광한이다. 종한의 자는 해여이며 호는 죽운이다. 성도가 온화하고 풍의가 준위하였다. 배위에 예안김씨로 진사 휘택의 여이고 조는 영효이며 증조는 영복이고 문절공 담의 후이다. 3형제를 낳으니 장에 휘 병식이요. 자는 춘가이며 호는 동주이이다. 차에 휘 창식이요. 자는 윤주이다. 공은 막내로 성장하여 상주 농잠재학중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사건에 가담 일경에 체포되어 구금중 부친 종한공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 활약 후 1928년경 국내로 잠입 박창호 한일청 등과 회합 예천 농민적색조합 무명결사대를 조직 농촌진흥회를 적화하기 위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적색분자를 잠입시켜 반란을 이르키고 자급자족의 기치하에 직업적 수평운동을 전개하던 중 결사대가 적발되어 1934년 3월경 약 350명이 검거되면서 핵심분자로 분류되어 조사를 받던 중 동년 8월 20일경 석방되었으나 극심한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음 8월 25일 서거하니 진실로 애석하다. 구국일념으로 나라를 위하여 28세의 젊음을 땅에 묻었다. 2006년 노무현 정권시 유해를 대전현충원에 안치하였다. 배위는 밀양박씨로 태훈의 여고 송당공영의 후이다. 3남매를 낳으니 장에 형기이고(1928년)생 차에는 형대인데(19
33년)생 6.25 전란으로 출외 미환이다. 여는 형숙인데 1932년 1월 1일생 생존하고 있다. 비안박씨 무화에게 출가하였고 공의 따님이 이번의 수비를 담당했다.
야유할손 천도무심인가? 향년 28세의 젊은나이에 생을 마쳤다. 인간의 근본은 충효에서 나오는 법이
모두가 조상의 보본이요. 음덕아닌 것이 없어라! 선조 양위의 묘정에 조그마한 빗돌을 세워 그 이름을 새겼
네. 아! 위대하여라. 그 남긴 업적 영원세구하리라.
야유할손 천도무심인가? 향년 28세의 젊은나이에 생을 마쳤다. 인간의 근본은 충효에서 나오는 법이
모두가 조상의 보본이요. 음덕아닌 것이 없어라! 선조 양위의 묘정에 조그마한 빗돌을 세워 그 이름을 새겼
네. 아! 위대하여라. 그 남긴 업적 영원세구하리라.
경북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죽고서원 앞에 있는 독립지사 남석 파평윤공 기적비를 찾아가고 있다.
참의 파평윤공 영모비
조금 더 가니까 죽고서원의 안내판이 보였다.
죽고서원은 18世인 晩遯菴(만둔암) 휘 師晳(사석)과 23世인 竹湖(죽호) 尹 涉(윤 섭)의 학덕을 기리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한 서원으로
영조47년(1771) 지역유림의 뜻을 모아 창건되었다.
영조47년(1771) 지역유림의 뜻을 모아 창건되었다.
독립지사 남석 파평윤공 기적비
공의 휘는 우식이요(초명 병근) 자는 영가이고 호는 남석이다. 공은(서기 1906년) 병오년 10월 19일 신풍리 망락당에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 왜구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고 전 국민이 비분강개하지 않는 이 그 누가 있으리요. 공의 나이는 겨우 다섯살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항일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된다. 선계는 파평이 시원이고 성은 윤씨이다. 고려태사 휘 화달이 그 시조이다. 5세에 휘 찬이 척지진 문하 시중이고 삼한을 덮었다. 시는 문숙이다. 그 이후 경상과 훈벌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국초 태종조에 휘 곤은 숭정대부 이조판서 파평군에 봉록되고 시는 소정이다. 그 증손 휘 사석은 성종조 남대로 집의였는데 연산 혼조시 왕을 크게 간하고 상소를 올린 후 청주 옥화대래 은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옥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