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이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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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가리 74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양이(韓良履) 의사
항일 독립투사 석초선생은 예천군 용궁면 송암리에서 태섭공의 둘째 아들님으로 탄생하시고 경서를 수학하며 유년기를 지나 장년이 되어 부친의 명을 받고 이강년 의병진에 초모되어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
이에 선생의 우국 충절을 기리고 공의 큰 뜻을 길이 후세에 남기려고 1971년 4월 25일 한양이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최가되고 후원에 경상북도, 경상북도교육위원회, 예천군, 예천군교육청, 유천면, 선생의 문하생(학계원) 일동이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石樵 韓良履 義士 記念碑(석초 한양이 의사 기념비)
만고에 높푸른 도솔봉 정기 받고 어버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몸은 쓰러져도 나라를 놓지 않았던 맵고 곧은 한 선비가 있었으니 이 분이 곧 한 양이 선생이시다.
1883년 1월 17일 예천군 용궁면 송암리에서 태섭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니 호는 석조요 자는 여경이며, 본관은 청주로서 준수한 기골과 활달한 기백에 충과 효의 빛나는 가통을 이어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1905년 망국의 을사조약이 강체되자 왜적은 우리의 주권을 앗아 가니 태섭공은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아 아들 양이와 함께 이 강년 의진의 참모로서 원수를 무찌르고 겨레를 달래다가 원통하게도 진중에서 병사하셨다.
선생은 「나라 사랑하는 내 뜻을 잊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고 소백산과 낙동강 일대를 누비며 나라의 원수와 맞서 피 맺힌 싸움을 거듭하여 의병의 서슬을 떨쳤다. 그러나 이강년공 및 장 윤덕공 등을 잃은 의진은 무너지고 하늘은 끝내 이 나라를 버렸으니 처절한 겨레의 울부짖음에 산천도 설워 흐느끼고 보주 영 맑은 샘도 노여워 흐려졌으리라.
선생은 뼛속에 사무친 원한을 가눌 길 없어 이 강년공의 아들 승재님과 의형제를 맺고 1912년 결사대를 조직하여 매국노의 처단을 꾀하였으나 탄로되어 승재님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으며 선생은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22년에는 신 태식 이 응수 김 찬규 서 상언 장 진우님 등 수십 명의 동지들과 의용단을 조직하고 길림성 군정서의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옛부터 선비는 목숨이 끊어져도 뜻은 굽히지 않는지라 출옥 후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구국의 일꾼을 기르고 겨레를 일깨운 보람있어 조국 광복을 보시고 1949년 3월 16일 돌아가시니 그의 한 살이 66세이시다.
이제 의로운 선생의 뜻을 높이 받들고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이 곳에 돌을 세워 그 자취를 새기고 삼가 노래를 부르노니
드높은 임의 기상 저 하늘에 치솟고 장하신 임의 넋은 이 강토에 스미니 나라 지킬 겨레의 슬기 푸르러 푸르고 늘 푸르리 임이여 이 푸른 동산에 길이 계시옵소서

서기 1971년 4월 25일
글 지은이 장 기홍
글씨 쓴이 리 동주
한 양이선생 기념사업회는 이 비를 세우다.
경북 예천군 유천면 가리 746 유천초등학교(구 유천중학교) 석초 한양이 의사 기념비를 찾아왔다.
石樵 韓良履 義士 記念碑(석초 한양이 의사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