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상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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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산3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국가가 순조롭게 발전할 때에는 개인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지만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당하면 개인도 어려운 난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이처럼 국가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 생명과 재산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고 노력한 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었고 그것이 후대에 길이 전하여질 때에 나라의 역사가 장구히 계승된다.
선생의 성은 박씨로 본관은 함양이며 휘는 주상이고 자는 양선이며 호는 남천이다. 금당실 입향조이자 조선 중종 조 이조정랑을 역임한 휘 종선공의 11대손이며 증조는 운산군수를 지낸 휘 중경이고
조는 통덕랑 한통이며 고는 검지중추부사 휘 필녕이고 비는 문충공 서애의 후손인 정조의 녀이며 선생은 1831년 8월 27일 용문면 금당실에서 삼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국이 남다르고 재지가 탁월하여 가학으로 사서삼경을 섭렵하여 영남소수였던 백형 산천 휘 조종과 칠곡군수를 지낸 중형 종당 휘 주운과 함께 유림의 칭송받는 선비로 이름이 났었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국가가 내외적으로 큰 파고의 격랑을 당하고 있었으니 1895년에는 제국주의 일본이 자행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공표 1896년 국왕의 아관파천등으로 세상과 상식이 뒤바뀌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선생께서는 이러한 국권침탈사태에 의분을 참아오던중 제1차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1896년 3월 65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창의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며 향리에서 선생을 따르며 모여든 의병이 수백명이나 운집하여 군세가 대단하였고 이웃고릉의 향교와 서당 각 문중에 격문을 보내 군자금을 모금하니 7400냥이나 되었다. 한편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기지 공격을 목표로 안동 예안 풍기 순흥 영주 봉화등 7개 군현의 의병장들이 3월 22일 예천에 모여 예천회맹을 결성 연합투쟁을 결의하고 5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하였다. 회맹군은 각각의 공격로를 정하여 왜군을 습격하기로 하는 한편 예천의병은 지역방어와 동시에 일부는 왜적의 태봉지원군을 차단하기위해 적성으로 이동하고 문경의병장 이강녕은 조령 봉쇄에 나섰다. 회맹군은 3월 29일 태봉기지공격에서 격전을 벌렸으나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패하고 말았다. 선생은 적성방어에서 돌아오는 의진과 합세하여 예천의병소를 재정비하고 기강을 잡으며 김하락 권세연 서상열등과 상호연대하며 유격전을 계속하였다. 6월 6일 안동에서 일본군과 합세한 경병이 공격하여오자 예천의병은 고평들로 출전하여 격렬하게 야간전투를 벌렸으나 무기의 열세로 많은 인명의 손실을 보고 후토한후 진영을 재편하고 태봉의병의 재공격을 목표로 함창으로 이동중 일제의 압력을 받은 고종황제의 의병해산령에 따라 지하로 잠복하여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1905년 의사늑약으로 국가의 주권이 피탈퇴자 유림의 2차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날때 선생은 병환으로 이에 참여하지 못해 가슴속에 울분을 담았을뿐이다. 망국으로 기울고 있는 파국에 대한 한을 품은채1908년 5월 6일에 77세로 서거하였다. 선생은 주변에서 엄습하여 오는 왜군의 위협을 무릅쓰고 오직 나라를 지키기위해 구국일념으로 온몸을 던진 실천적 선비였다. 이러한 구국정신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의 기세를 분쇄하고 좌절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고 예천사람들의 항일의식을 크게 자극하여 호국정신을 일깨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되었고 유해는 2002년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배위와 함께 이장 안장되었다(묘역 제 875호). 배는 공인 장흥임씨이며 자는 동진이고 손은 철수 갑수 억수 익수이다. 선생의 애국충정의 정신을 계승하고 길이 후대의 귀감으로 삼고자 선생이 평생 살았던 이곳에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추모비를 세운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산 32 금당실마을 오비봉 의병대장 남천 박주상 선생 추모비를 찾아가고 있다.
애국지사 의병대장 남천 박주상선생 추모비
왜적들의 간악함이 궁성까지 짓밟으니 통분한 선비들이 창의하여 일어섰네
천만년의 종묘사직 무궁할것 읻었더니 한스럽다 나라형편 만백성이 통탄한다
부국강병 못갖추니 열강들이 넘보누나 오천년의 긴긴역사 우리들이 지키리다
남천선생이 남긴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