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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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213-3
탐방로그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278-1 용궁초등학교에 있는 의사 장진우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 장진우 선생 기념비는 학교 내 오른쪽에 있는 솔숲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학교 내 오른쪽에 있는 솔숲
義士 淸雲 先生 張公 記念碑(의사 청운 선생 장공 기념비)
나라 사랑의 매운 뜻은 역사의 향기요 겨레의 등불이다. 일찌기 20세기 초에 이 땅을 짓밟던 왜적에 항거하여 민족의 얼을 살리고 빛낸 분이 있으니 꽃다운 그 이름은 장진우 선생이다. 서기 1866년 7월 24일 예천군 용궁면 산택리에서 태어나시니 본관은 울진이요 영수공의 맏이다. 아호는 청운이며 자는 여심이다. 착하고 슬기로운 천성으로 어버이의 뜻을 이어 글을 읽고 덕을 닦아 이웃을 이끌고 후배를 가르치며 맑고 곧게 살았다. 1905년 무렵부터
왜적의 손길에 더욱 거칠어지자 여러 곳에서 의병의 햇불이 타올랐다. 붓을 던지고 일어서 문경의 의병장 신태식이며 족친 장진성 장세명 등 여러 동지들과 의진의 깃발 아래로 뛰어들었다. 직접 총칼로 싸우는 한편 군자금 조달과 의병 소모에 더욱 많은 공을 세웠다. 의병의 칼은 부러지고 사직이 무너지자 흩어진 동지를 다시 규합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에 피어린 싸움을 계속하였다. 3.1 운동에 앞장서 원수를 꾸짖었으며 이응수 신태식 이명규 한양이 등 동지들과 의용단을 조직하고 해외 독립 운동의 자금 조달과 지하 조직 활동에 분주하였으며 스스로 가산을 기울여 거액을 던졌다. 1922년 12월 20일 동지들과 함께 원수의 손에 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그들의 모진 손톱에 피가 마르고 뼈가 깎였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고 왜적과 싸웠다. 1945년 5월 25일 원수가 물러감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버리니 그의 한 살이 80년이다. 선생의 아들 성목씨도 아버지의 뜻을 배워 광복 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치었고 다시 중국 상해 방면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굳은 지조 붉은 정성 붓과 칼에 담고서 나라 위한 한 길로 대를 이어 나아가니 충과 효가 한 빛으로 길이길이 푸르리라.

정휘창 글을 짓고 리동주 글씨를 쓰고 장진우 선생 기념 사업회는 이 비를 세우다.

나라를 사랑함은 겨레의 한뜻이요. 조상을 우리들은 혈육의 정이라 여기 돌을 세워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뜻을 밝히고 대를 이어 맺힌 마음을 이에 새기노라. 1971년 5월 21일 증손 석대는 울면서 적노라.
예천을 찾았다.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278-1 용궁초등학교에 있는 의사 장진우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