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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20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206 의사 세심헌 성주 이공 규홍 사적비를 찾아왔다.
義士 洗心軒 星州 二公 圭洪 洗心軒亭 및 事蹟碑(의사 세심헌 성주 이공 규홍 세심헌정 및 사적비)
세심헌 이공은 철정경술(1850) 10월 3일 용궁면 나산리제에서 출생. 공의 본관 성주이씨는 신라때 재상 휘 순유를 시조로 삼는다. 고려 정당문학 문열공 휘 조년은 현조이다. 공은 향년 68세에 돌아가니 무오년(1918) 10월 18일이다. 입암 뒷산 부임원에 장사후 세심헌정 전산 갈라산에 이장, 부인과 같은 무덤이다. 공은 서산 김흥ㅎ락선생을 배알하여 먼저 자신을 닦은 후에 가정과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으며 공은 부지런히 이치를 규명하는 공부에 힘썼다. 경사와 성리서를 궁구하는것으로 그 기본을 세우고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더욱 주밀하였다.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아픈 마음으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창의사상을 키워 동지들과 맹약하고 몰래 설욕을 꾀하려 일곱 번 거창을 찾았고, 세번이나 한강을 건넜다. 공은 군자금을 조달하는 군자부로서 운강 이강년과 의맹하고 의연금 만금을 모아 의막에 보냈다. 편지를 중국에 보내 외국원조를 돕도록 했으니, 그의 고심과 열혈은 뜻을 준동시키고 천심을 감동시켰다.. 공의 타고난 자품이 뛰어났고 공부한 바가 매우 두터웠으며, 평생 도의로 서로 귀의한 곳은 석주선생이다. 공의 저술은 심성정도설, 인도심도설, 열대통론, 주레한전요략, 감국정요등이다. 공은 독립유공자 포상(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52년 10월 세심헌정이 건립되고 2005년 2월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세심헌 이공은 철정경술(1850) 10월 3일 용궁면 나산리제에서 출생. 공의 본관 성주이씨는 신라때 재상 휘 순유를 시조로 삼는다. 고려 정당문학 문열공 휘 조년은 현조이다. 공은 향년 68세에 돌아가니 무오년(1918) 10월 18일이다. 입암 뒷산 부임원에 장사후 세심헌정 전산 갈라산에 이장, 부인과 같은 무덤이다. 공은 서산 김흥ㅎ락선생을 배알하여 먼저 자신을 닦은 후에 가정과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으며 공은 부지런히 이치를 규명하는 공부에 힘썼다. 경사와 성리서를 궁구하는것으로 그 기본을 세우고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더욱 주밀하였다.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아픈 마음으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창의사상을 키워 동지들과 맹약하고 몰래 설욕을 꾀하려 일곱 번 거창을 찾았고, 세번이나 한강을 건넜다. 공은 군자금을 조달하는 군자부로서 운강 이강년과 의맹하고 의연금 만금을 모아 의막에 보냈다. 편지를 중국에 보내 외국원조를 돕도록 했으니, 그의 고심과 열혈은 뜻을 준동시키고 천심을 감동시켰다.. 공의 타고난 자품이 뛰어났고 공부한 바가 매우 두터웠으며, 평생 도의로 서로 귀의한 곳은 석주선생이다. 공의 저술은 심성정도설, 인도심도설, 열대통론, 주레한전요략, 감국정요등이다. 공은 독립유공자 포상(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52년 10월 세심헌정이 건립되고 2005년 2월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自銘志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같다. 서둘지 마라 부자유를 항상이라. 생각하면 부족이 없다. 마음에 희망이 있다면 곤궁한 떄를 생각하라. 전인은 무사장구의 근본 화를 적으로 생각하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해가 그 몸에 이른다 나를 알고 사람을 책 하지마라 비치지 못함은 스쳐버림과 같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같다. 서둘지 마라 부자유를 항상이라. 생각하면 부족이 없다. 마음에 희망이 있다면 곤궁한 떄를 생각하라. 전인은 무사장구의 근본 화를 적으로 생각하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해가 그 몸에 이른다 나를 알고 사람을 책 하지마라 비치지 못함은 스쳐버림과 같다.
이강년 의진과 차성충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규홍은 1895년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변보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런데 1896년 1월 이강년이 의병진을 일으켜 활동하자 암암리에 내통하여 동지의 의를 맺고, 일제를 구축하는 계획에 적극 가담하여 의병모집 활동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이강년 의병진이 친일적 행위를 한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잡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때때로 사람을 의병진에 보내어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 후 그는 1905년 안동의 석주 이상룡, 서울의 심연 김현준, 거창의 은표 차성충, 영춘의 백우 김상태 등과 혈맹으로 뭉쳐 의병활동을 모의하였다. 특히 그해 11월 을사륵약이 강요되자 그는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려고, 그해 11월 김심연·차성충이 김천에서 의병활동을 모의하였을 때 큰 아들 이지선을 보내 도왔다. 그 후 이지선을 이강년 의병진에 보내 활동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따라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이규홍은 1907년 김현준·차성춘 등과 의병의 계책을 모의하고, 그해 8월에는 금룡사에 유진하는 이강년을 방문하여 의병활동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1908년 이상룡이 사람을 보내어 군자금을 요청하자 아들 지선과 사위 이세형을 통해 거창의 차은표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차은표로 하여금 가조산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차은표 등은 1909년 의병 수백 명을 규합하여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차은표를 대장으로 김상태를 중군장으로 삼아 풍기·순흥·영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1909년 5월 차은표가 순국하면서 의병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1913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그이 아들 이문극을 이규홍에게 파견하였다. 이에 그는 이문극을 만나 국외와 국내 민족운동 세력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義士 洗心軒 星州 二公 圭洪 事蹟碑(의사 세심헌 성주 이공 규홍 사적비)
출처 : 보훈처 공훈록
義士 洗心軒 星州 二公 圭洪 事蹟碑(의사 세심헌 성주 이공 규홍 사적비)
세심헌 이공은 철종경술(1850) 10월 3일 용궁면 나산리제에서 출생 큰키와 밝은 얼굴로 풍체는 사람을 감동시켰고 말할 때 논리가 유창하면서 조리가 있었다. 공은 그릇이 크고 생각하는 바가 구차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과거 공부는 예능으로 족히 배울 것이 못됨을 알았고 개연히 당세를 경륜하는 뜻을 지녔다. 얼마 후 서산 김흥락 선생을 배알하여 먼저 자신을 닦은 후에 가정과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공은 부지런히 이치를 규명하는 공부에 힘썼다. 경사와 성리학을 궁구하는 것으로 그 기본을 세우고 나아가 예락과 이치를 통하여 그 규모를 넓혔다. 따라서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더욱 주밀하고 확충하여 체를 간직하고 용에 달하는 실효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기회가 이르지 않아 포부를 펼 수 없었고 이어서 나라의 치욕을 당하자 아픈 마음으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창의사상을 키워 동지들과 맹약하고 몰래 설욕을 꾀하려 일곱 번 거창을 찾았고 세 번이나 한강을 건넜다. 공은 군자금을 조달하는 군자부로서 운강 이강년과 의맹하고
의연금 만 금을 모아 의막에 보냈다. 편지를 중국에 보내 외국 원조를 돕도록 했으니 그의 고심과 열혈은 백성들의 뜻을 준동시키고 천심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운명은 어긋나 따라주지 않으니 마음은 끝내 울분으로 신음하다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시류에 따라 영합하고 본래 모습을 숨겼다. 그러나 공은 분연히 스스로 일어나 윤강은 땅에 떨어뜨릴 수 없고 원수와 한 하늘아래 같이 살 수 없다고 했다. 그 공적은 일시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꺽이고 곤궁한 삶은 또한 족히 천고 뒤에 지사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공은 독립유공자 포상(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공은 타고난 자품이 뛰어났고 공부한 바가 매우 두터웠다. 또한 많은 사우로부터 학문을 강마한 가운데 이뤘고 평생 도의로 서로 귀의한 곳은 석주선생이다. 심연 김현준 백우 김상태 은표 차성충은 의로서 생사를 맹세한 벗이다. 공의 저술은 〈심성정도설〉〈인도심도설〉〈역대통론〉〈주예한전요약〉〈감국정요〉등이다. 집안에 간직하여 후세에 전하니 명하여 이르되
학문은 널리 천인을 통했고 뜻은 항상 구국에 있었다. 그러나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황천에서 눈물을 흘리네. 의열에 한 몸 꺽이었으니 그 울분 드러내지 못했다. 갈라산 높은 둔덕에 묘비 우뚝 솟았네. 내 명은 지나친 말이 아니요. 바로 공의 잠광이지요. 2005년 2월
영가후인 권상규 공이 찬한 묘갈명을 불초손 윤환 역근서
학문은 널리 천인을 통했고 뜻은 항상 구국에 있었다. 그러나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황천에서 눈물을 흘리네. 의열에 한 몸 꺽이었으니 그 울분 드러내지 못했다. 갈라산 높은 둔덕에 묘비 우뚝 솟았네. 내 명은 지나친 말이 아니요. 바로 공의 잠광이지요. 2005년 2월
영가후인 권상규 공이 찬한 묘갈명을 불초손 윤환 역근서
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