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158
- 탐방로그
-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158에 위치한 장윤덕 선생 묘를 찾았다. 장윤덕 선생의 순국기념비는 경북대학교 교정 내에 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선생의 묘앞에서 앞쪽에는 작은 산봉우리가 있어서 안보이고, 왼쪽에 보이는 마을 집들
봉우리 오른쪽으로 보이는 보문사 주차장. 왼쪽, 오른쪽 어느쪽으로 올라와도 된다.
의병장 성암 장윤덕 선생의 묘소
보문사의 주소인 경북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158를 목적지로 설정하고 가는 중이다
보문사의 주소인 경북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158를 목적지로 설정하고 가는 중이다
장윤덕 선생의 순국기념비는 경북대학교 교정 내에 있다.
보문사 주차장 회차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앞에 작은 봉우리가 있어서 보이질 않지만, 그 봉우리 뒤쪽에 묘소가 있다.
앞에 작은 봉우리가 있어서 보이질 않지만, 그 봉우리 뒤쪽에 묘소가 있다.
선생은 전투 중 대구수비대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출동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은 무너지고 장윤덕 의사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뒷산에서 총살당하여 3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병장 성암 장윤덕선생 묘소
영남은 예로부터 민족정기의 발상지요 구국제민의 기운이 싹튼 중심지이다.
멀리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비롯하여 임진왜란때는 용장과 의병이 구름같이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고 가까이는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지자 마을마다 의사, 열사, 지사가 국국을 회복코자 생명을 바쳐가며 독립투쟁을 하였으니 이 고장은 지영, 인걸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와같이 연면히 계승된 민족정기의 전통위에 찬란한 성좌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의사 한분이 계시니 이분이 곧 의병대장 성암 장윤덕선생이시다.
선생의 본관은 단양이고 고려 삼중대신 벽상공신 태사 충헌공 휘 정필을 시조로 잠재선생 휘 근의 12세손이다.
1872년 7월 6일 예천읍 노상동에서 통정대부 휘 재안을 아버지로, 숙부인 평해황씨를 어머니로 탄생하시니 자는 원숙이요 호는 성암이다.
멀리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비롯하여 임진왜란때는 용장과 의병이 구름같이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고 가까이는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지자 마을마다 의사, 열사, 지사가 국국을 회복코자 생명을 바쳐가며 독립투쟁을 하였으니 이 고장은 지영, 인걸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와같이 연면히 계승된 민족정기의 전통위에 찬란한 성좌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의사 한분이 계시니 이분이 곧 의병대장 성암 장윤덕선생이시다.
선생의 본관은 단양이고 고려 삼중대신 벽상공신 태사 충헌공 휘 정필을 시조로 잠재선생 휘 근의 12세손이다.
1872년 7월 6일 예천읍 노상동에서 통정대부 휘 재안을 아버지로, 숙부인 평해황씨를 어머니로 탄생하시니 자는 원숙이요 호는 성암이다.
일찌기 한학을 닦고 충효에 뜻이 깊었으며 구한말의 왜적의 침략마수가 뻗치고 있을때 뜻한바 있어 예천군 수서기직을 맡으니 군민들에게 배일구국사상을 고취하다가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되자 분연히 칼을 짚고 일어나 왜요인과 매국노들의 모참을 목적으로 1907년 4월 상경하였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골수에 사무친 의분을 가눌길 없어 재거를 꾀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년 7월 예천군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풍기, 봉화, 문경, 용궁,예천등지의 적을 소탕하다가 동년 9월 10일 이강년, 민긍호등 의병장과 합진하여 1000여명의 병력으로써 문경면 갈평리 전투에서 흉적 미하라소위와 영합경시가 인솔하던 수비대및 경찰대를 섬멸시켜 적유의 간담을 서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들의 용맹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여기서 다시 병력을 나누어 선생은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기 위하여 대를 향해 진격하던 도중 상주읍에서 적의 자위단과 다나카대위가 인솔하는 대구수비대를 만나 격전끝에 총총상으로 피첩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굴하지않고 도리어 정작을 크게 꾸짖은 뒤 스스로 혀를 끊어 결구불언의 곧은 절개를 지키다가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뒷산에서 비분의 총살형을 당하시니 때는 1907년 9월 16일 향년이 35세이었다. 부인 함녕김씨는 성률공의 따님으로 숙덕이 있더니 변을 당한 후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유리표박으로 잔명을 이어오다가 1942년 선생의 35주기 기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장남 시환의 아들에 기목, 기홍, 기봉이 있고, 차남 인환의 아들에 기진, 기웅이 있는데 모두 총준한 인재들이요 증손에 국현, 문현, 진현, 익현, 원현, 항현 재현, 성욱이 있으나 아직 어리다. 이제 광복된 조국에서는 경향의 ?산들이 힘을 모아 숭고한 유지를 받들고 의로운 사적을 길이 전하고자 광복 20주년을 기하여 경북대학교에 순국비를 세우고 또한 이 묘비를 다듬어서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내 비록 그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의를 스승으로 삼는 피를 지녔기에 문헌을 살펴 그 날의 사적을 적고 삼가 노래를 새기노니
사직이 무너질제 일천여 의병몰아
왜적을 무찔다가 의혈뿌리시니
의혈엉켜 반석되고 반석위에 나라섰네
이제 자 비 바람친다 쓰어지리
임이여! 원한의 두 눈감으소서
선생의 순국 60주년인 서기 1967년 7월 16일
앞글 쓴이 대통령 박정희 글지은이 경상북도지사 김인
마련한이 장윤덕의사 기념사업회장
뒷글쓴이 대구시 총무과장 안병우
사직이 무너질제 일천여 의병몰아
왜적을 무찔다가 의혈뿌리시니
의혈엉켜 반석되고 반석위에 나라섰네
이제 자 비 바람친다 쓰어지리
임이여! 원한의 두 눈감으소서
선생의 순국 60주년인 서기 1967년 7월 16일
앞글 쓴이 대통령 박정희 글지은이 경상북도지사 김인
마련한이 장윤덕의사 기념사업회장
뒷글쓴이 대구시 총무과장 안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