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산1-28
- 탐방로그
- 적목리 공동생활유적은 두 개의 유적으로 서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으나 그 성격은 같다. 본래 처음 유적이 1986년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되었으나 동일한 번지 내에 유적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각각 제13-1호, 13-2호로 지정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성경과 종교서적들을 감추어 두었던 곳
이곳은 일경의 눈을 피해서 산으로 올라갈 때, 성경과 찬송가 및 영감적인 종교서적(예언의 신)들을 감추어 두었던 곳이다. 이 공동체에는 경향각지에서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 교회해산, 그리고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징집과 징용을 피해 온 분들이 많이 있어서 주변 동네로부터도 격리된 생활을 했다. 당시 이런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앙양심에 근거한 애국적 행동이었다. 이곳에 오가는 분들은 가평지역 주민들을 피해서 다녔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 특히 징집과 징용을 피해서 찾아오는 많은 젊은이들의 출입이 잦아지자 가평 헌병대에 밀고가 들어갔다. 그래서 1944년 7월 중순 일본헌병대가 조사를 나왔다.
다행이 이 사실을 경춘철도주식회사의 한 직원이 미리 알려주어서 젊은 청년들이 깊은 산 속으로 다 피신하여 검거를 피하고 화를 면했다. 그 전에는 교회에서 안식일(토요일)에 정상적인 예배를 드렸지만, 그 이후에는 오전에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예배만 드렸다. 이사안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청년들은 즉시 주위의 2~4㎞ 떨어진 깊은 산 속으로 피하도록 했고 며칠씩 산에서 머루, 다래 및 풀뿌리 등을 먹고 살았다. 밑에서 안전하다는 연락이 오면 다시 움막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성경과 종교서적 등을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바위나 돌 밑에 숨겨놓고 산으로 올라갈 때 가지고 갔다가 집으로 내려올 때 다시 놓고 왔다.
이곳은 일경의 눈을 피해서 산으로 올라갈 때, 성경과 찬송가 및 영감적인 종교서적(예언의 신)들을 감추어 두었던 곳이다. 이 공동체에는 경향각지에서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 교회해산, 그리고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징집과 징용을 피해 온 분들이 많이 있어서 주변 동네로부터도 격리된 생활을 했다. 당시 이런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앙양심에 근거한 애국적 행동이었다. 이곳에 오가는 분들은 가평지역 주민들을 피해서 다녔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 특히 징집과 징용을 피해서 찾아오는 많은 젊은이들의 출입이 잦아지자 가평 헌병대에 밀고가 들어갔다. 그래서 1944년 7월 중순 일본헌병대가 조사를 나왔다.
다행이 이 사실을 경춘철도주식회사의 한 직원이 미리 알려주어서 젊은 청년들이 깊은 산 속으로 다 피신하여 검거를 피하고 화를 면했다. 그 전에는 교회에서 안식일(토요일)에 정상적인 예배를 드렸지만, 그 이후에는 오전에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예배만 드렸다. 이사안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청년들은 즉시 주위의 2~4㎞ 떨어진 깊은 산 속으로 피하도록 했고 며칠씩 산에서 머루, 다래 및 풀뿌리 등을 먹고 살았다. 밑에서 안전하다는 연락이 오면 다시 움막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성경과 종교서적 등을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바위나 돌 밑에 숨겨놓고 산으로 올라갈 때 가지고 갔다가 집으로 내려올 때 다시 놓고 왔다.
적목리 신앙공동체 증인들
신태식 - 이곳 공동체 생활을 처음 제안한 분으로 당시 운천 출신의 윤홍섭의 소개로 산판 한 판을 떼어받아 전국적으로 신앙 동지들을 모아서 산판에서 일하며 항일 및 신앙 지도함.
반내현 -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
반내병 - 반내현 씨의 형님.
신태복 - 강원도 화천 출신으로 당시 공무원으로 공동체의 총무를 맡아 살림을 이끈 지도자.
신태흥, 신태섭, 신태법 - 신태식 씨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함.
노원호, 노사라, 최선일, 홍성실, 오춘수, 오명숙, 지현각, 고자선 - 평안도에서 이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함.
오명선, 최종섭 - 황해도 황주에서 이주함.
반대일 - 거제도에서 이주함.
김봉락 -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거장리에서 이주함.
김인식 - 경기도 개성에서 이주함.
황봉호, 송명호, 김기홍, 이대련, 강태봉, 장군선, 김태순, 신서균, 신우균, 신선희, 신선영, 신선옥, 신선녀,
이사래, 신영균, 김순희, 반상순, 반효순, 이연화, 반기상, 반정일, 반기화, 임봉순, 임경옥, 노춘애, 노춘식,
이종애, 이남기, 전명숙, 조영애, 김화신, 김명길, 조경철, 최명기, 신종균, 강한영, 정인섭, 강태봉, 김기홍,
신순애, 이광실 외(선구자들과 이분들의 후손들의 대부분은 국내.외에서 활동 중이며 연락 가능함).
신태식 - 이곳 공동체 생활을 처음 제안한 분으로 당시 운천 출신의 윤홍섭의 소개로 산판 한 판을 떼어받아 전국적으로 신앙 동지들을 모아서 산판에서 일하며 항일 및 신앙 지도함.
반내현 -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
반내병 - 반내현 씨의 형님.
신태복 - 강원도 화천 출신으로 당시 공무원으로 공동체의 총무를 맡아 살림을 이끈 지도자.
신태흥, 신태섭, 신태법 - 신태식 씨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함.
노원호, 노사라, 최선일, 홍성실, 오춘수, 오명숙, 지현각, 고자선 - 평안도에서 이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함.
오명선, 최종섭 - 황해도 황주에서 이주함.
반대일 - 거제도에서 이주함.
김봉락 -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거장리에서 이주함.
김인식 - 경기도 개성에서 이주함.
황봉호, 송명호, 김기홍, 이대련, 강태봉, 장군선, 김태순, 신서균, 신우균, 신선희, 신선영, 신선옥, 신선녀,
이사래, 신영균, 김순희, 반상순, 반효순, 이연화, 반기상, 반정일, 반기화, 임봉순, 임경옥, 노춘애, 노춘식,
이종애, 이남기, 전명숙, 조영애, 김화신, 김명길, 조경철, 최명기, 신종균, 강한영, 정인섭, 강태봉, 김기홍,
신순애, 이광실 외(선구자들과 이분들의 후손들의 대부분은 국내.외에서 활동 중이며 연락 가능함).
한국선교 90주년 신앙의 뿌리찾기 순례기념
삼육대학교 신학과 1994년 10월 8일
삼육대학교 신학과 1994년 10월 8일
교회터
반 지하로 된 25평의 집회소로 두 개의 창이 있었고 출입구는 동쪽에 있었다. 1943년 9월 15일 신태식,반내현 그리고 뜻을 같이 한 여러 명의 선발대들이 이곳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지은 곳으로 반 지하 형태의 25평짜리 움막 교회였다. 일본헌병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바닥은 1~2m를 파고 갈대를 깔았으며 벽은 흙과 돌벽이었다. 위는 나무로 이어 시야를 흙으로 막고 그 위에 통나무로 지붕을 만들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교회 터를 정하고 돌단을 쌓은 뒤 기도회를 가졌다. 자신들의 거할 처소를 마련하기 전 먼저 합심하여 통나무 교회를 완성했다. 교회는 공동체 삶의 중심이었고, 기도로 새벽을 깨우고 예배를 드렸으며 낮에는 험한 산판에서 일하고 밤에는 관솔불을 켜고 이곳에서 경경을 연구했다. 조석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해방과 고난받는 민족과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헌병대 조사가 있기 전에는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었지만, 일경의 조사 후에는 이곳에서 사방으로 2~4㎞ 떨어진 깊은 산속에 흩어져 예배를 드렸다.
반 지하로 된 25평의 집회소로 두 개의 창이 있었고 출입구는 동쪽에 있었다. 1943년 9월 15일 신태식,반내현 그리고 뜻을 같이 한 여러 명의 선발대들이 이곳에 들어와 제일 먼저 지은 곳으로 반 지하 형태의 25평짜리 움막 교회였다. 일본헌병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바닥은 1~2m를 파고 갈대를 깔았으며 벽은 흙과 돌벽이었다. 위는 나무로 이어 시야를 흙으로 막고 그 위에 통나무로 지붕을 만들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교회 터를 정하고 돌단을 쌓은 뒤 기도회를 가졌다. 자신들의 거할 처소를 마련하기 전 먼저 합심하여 통나무 교회를 완성했다. 교회는 공동체 삶의 중심이었고, 기도로 새벽을 깨우고 예배를 드렸으며 낮에는 험한 산판에서 일하고 밤에는 관솔불을 켜고 이곳에서 경경을 연구했다. 조석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해방과 고난받는 민족과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헌병대 조사가 있기 전에는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었지만, 일경의 조사 후에는 이곳에서 사방으로 2~4㎞ 떨어진 깊은 산속에 흩어져 예배를 드렸다.
관솔불터
이 자리는 반 지하 교회의 일부였다. 관솔은 소나무 가지를 자른 자리에 그 진이 묻어 엉킨 것인데, 이것을 이곳에서 태움으로써 그 빛으로 성경연구와 기도회를 열었다. 이 불로써 겨울철에 난방을 했다. 석유나 연탄을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믿음의 장부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다.
이 자리는 반 지하 교회의 일부였다. 관솔은 소나무 가지를 자른 자리에 그 진이 묻어 엉킨 것인데, 이것을 이곳에서 태움으로써 그 빛으로 성경연구와 기도회를 열었다. 이 불로써 겨울철에 난방을 했다. 석유나 연탄을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믿음의 장부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곳이다.
적목리의 하루 일정과 안식일(토요일)
새벽기도 : 새벽 5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함.
식사 : 아침은 7시경 주로 배급으로 받은 현미쌀과 시래기국, 점심은 아침에 싸간 주먹밥, 저녁은 벌목 작업 후 6시 경에 식사함.
작업 :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경춘철도 임업주식회사에서 벌목하고 침목 깎는 일을 함.
저녁예배 : 저녁식사 후 2시간 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경 공부함.
토요일 : 1944년 7월 중순 일본헌병대가 조사하기 전에는 교회에서 정상적인 안식일 예배를 드렸지만, 수사한 후부터는 오전에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예배만 드렸다. 매 안식일 오후에는 나무하러 가는 차림으로 교회에서 2~4f㎞ 떨어진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함께 성경도 공부하고 찬송도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고 해가 저물 무렵 나무하러 갔다 오는 차림으로 다시 내려오곤 했다.
새벽기도 : 새벽 5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함.
식사 : 아침은 7시경 주로 배급으로 받은 현미쌀과 시래기국, 점심은 아침에 싸간 주먹밥, 저녁은 벌목 작업 후 6시 경에 식사함.
작업 :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경춘철도 임업주식회사에서 벌목하고 침목 깎는 일을 함.
저녁예배 : 저녁식사 후 2시간 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경 공부함.
토요일 : 1944년 7월 중순 일본헌병대가 조사하기 전에는 교회에서 정상적인 안식일 예배를 드렸지만, 수사한 후부터는 오전에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예배만 드렸다. 매 안식일 오후에는 나무하러 가는 차림으로 교회에서 2~4f㎞ 떨어진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함께 성경도 공부하고 찬송도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고 해가 저물 무렵 나무하러 갔다 오는 차림으로 다시 내려오곤 했다.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2 /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호
공동생활유적은 일제강점기에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던 곳으로, 1943년 신사참배 창씨개명.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은신하며 신앙심을 지키던 유적이다.
유적지는 약 1㎞를 사이에 두고 2곳에 조성되어 있으며 목탄생산과 경춘철도에 소요되는 침목조달을 하며 광복 이후까지 초목 근피로 연명하며 거처하였다.
제2유적지는 이전부터 숯가마가 있던 곳을 활용하여 조성되었으며 교회터와 침례터, 집터, 움막터 등이 남아 있다.
공동생활유적은 일제의 탄압에 신앙공동체로 저항한 불복종 민족운동의 의의를 가지며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의 생활상 및 종교, 풍속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공동생활유적은 일제강점기에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던 곳으로, 1943년 신사참배 창씨개명.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은신하며 신앙심을 지키던 유적이다.
유적지는 약 1㎞를 사이에 두고 2곳에 조성되어 있으며 목탄생산과 경춘철도에 소요되는 침목조달을 하며 광복 이후까지 초목 근피로 연명하며 거처하였다.
제2유적지는 이전부터 숯가마가 있던 곳을 활용하여 조성되었으며 교회터와 침례터, 집터, 움막터 등이 남아 있다.
공동생활유적은 일제의 탄압에 신앙공동체로 저항한 불복종 민족운동의 의의를 가지며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의 생활상 및 종교, 풍속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적목리 신앙공동체 유적지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2(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호)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1(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11호)가 존재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적목리 신앙 유적지 /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1(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11호)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1 /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1호
공동생활유적은 일제강점기에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던 곳으로, 1943년 신사참배 창씨개명.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은신하며 신앙심을 지키던 유적이다.
유적지는 약 1㎞를 사이에 두고 2곳에 조성되어 있으며 목탄생산과 경춘철도에 소요되는 침목조달을 하며 광복 이후까지 초목 근피로 연명하며 거처하였다.
제2유적지는 이전부터 숯가마가 있던 곳을 활용하여 조성되었으며 교회터와 침례터, 집터, 움막터 등이 남아 있다.
공동생활유적은 일제의 탄압에 신앙공동체로 저항한 불복종 민족운동의 의의를 가지며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의 생활상 및 종교, 풍속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공동생활유적은 일제강점기에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던 곳으로, 1943년 신사참배 창씨개명.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은신하며 신앙심을 지키던 유적이다.
유적지는 약 1㎞를 사이에 두고 2곳에 조성되어 있으며 목탄생산과 경춘철도에 소요되는 침목조달을 하며 광복 이후까지 초목 근피로 연명하며 거처하였다.
제2유적지는 이전부터 숯가마가 있던 곳을 활용하여 조성되었으며 교회터와 침례터, 집터, 움막터 등이 남아 있다.
공동생활유적은 일제의 탄압에 신앙공동체로 저항한 불복종 민족운동의 의의를 가지며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의 생활상 및 종교, 풍속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적목리 신앙 유적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적목리 신앙 유적지
삼육대학교 대학원 신학대학원 신앙 유적지 순례 기념
1994.10.19
삼육대학교 대학원 신학대학원 신앙 유적지 순례 기념
1994.10.19
적목리 신앙공동체 연혁
1943년 9월 15일 신태식.반내현 선생을 위시한 여러 명의 선발대 도착 및 움막 건조.
1943년 12월 초 연말 기도주일 및 사경회(강사 : 김명길 목사), 민족독립과 해방, 교회를 위해 간절히 합심 기도함.
1943년 12월 28일 일제탄압에 의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해산됨.
1944년 5월 중순 3명의 침례식(노사라, 오명숙, 지현각 모친)을 거행함. (시침 : 김명길 목사)
1944년 7월 중순 일제 헌병대의 조사를 받음. 이후 안식일 오후를 주위 2~4㎞ 떨어진 산 속에서 찬송과 성경공부, 기도 등 예배를 드림.
1944년 7월 말경 헌병대의 재수사 우려로 강제 징집될만한 청년들을 금강산 권봉사로 피신시킴.
1944년 12월 초 연말기도주일 및 사경회(강사 : 조경철 목사), 조국해방과 모진 고문과 핍박 속에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
1945년 8월 22일 해방 소식을 듣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하산함(경춘철도 직원이 알려줌).
1943년 9월 15일 신태식.반내현 선생을 위시한 여러 명의 선발대 도착 및 움막 건조.
1943년 12월 초 연말 기도주일 및 사경회(강사 : 김명길 목사), 민족독립과 해방, 교회를 위해 간절히 합심 기도함.
1943년 12월 28일 일제탄압에 의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해산됨.
1944년 5월 중순 3명의 침례식(노사라, 오명숙, 지현각 모친)을 거행함. (시침 : 김명길 목사)
1944년 7월 중순 일제 헌병대의 조사를 받음. 이후 안식일 오후를 주위 2~4㎞ 떨어진 산 속에서 찬송과 성경공부, 기도 등 예배를 드림.
1944년 7월 말경 헌병대의 재수사 우려로 강제 징집될만한 청년들을 금강산 권봉사로 피신시킴.
1944년 12월 초 연말기도주일 및 사경회(강사 : 조경철 목사), 조국해방과 모진 고문과 핍박 속에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
1945년 8월 22일 해방 소식을 듣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하산함(경춘철도 직원이 알려줌).
생활상
100여 명이 신앙 공동체 생활을 했다. 생계는 경춘철도 임업회사에서 침목 만드는 작업을 하청받아 벌목함으로써 양식의 일부를 조달했다. 작업명단에 올라간 14명은 현미쌀(일당 어른은 700g, 어린이는 300g)과 소금 약간을 배급받았다. 이로써는 100여명의 식생활을 하기에는 항상 태부족("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 당시 지도자 한 분의 증언)이었지만, 부족한 식량이라도 항상 같이 나누어 먹고 살았다. 일제 탄압을 피해 뜻을 같이 하는 신앙인들, 특히 강제징집을 피해서 이곳에 피한 청년들은 배급은 받을 수 없었지만, 숫자가 늘어나서 모두가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독이 없는 모든 풀을 뜯어 먹었다. 특히 겨울에는 음식을 구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 되어 풀부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했다. 그리하여 주변 소나무 껍질들이 벗겨져 하얀 부분이 흉하게 보였다. 소나무 껍질과 밀가루로 만든 송기떡으로 배고픔을 달래었고, 이것을 먹어 소화시키는 것과 용변을 보는데 어려움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아이들은 화장실 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어른들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식수는 개울물을 사용했고, 교회 주변의 작은 공간들을 텃밭으로 사용하여 배추, 무 등을 심어 재배했다. 초대 교회처럼(사도행전 1:42-47) 유무상통의 생활을 했다. 모두가 오직 믿음으라 만난(萬難)을 극복했고, 작업, 예배 및 성경연구를 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그들의 활발한 전도활동을 통해 수많은 교회를 세우며 지도자를 양성했다. 그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민족혼을 일깨우고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100여 명이 신앙 공동체 생활을 했다. 생계는 경춘철도 임업회사에서 침목 만드는 작업을 하청받아 벌목함으로써 양식의 일부를 조달했다. 작업명단에 올라간 14명은 현미쌀(일당 어른은 700g, 어린이는 300g)과 소금 약간을 배급받았다. 이로써는 100여명의 식생활을 하기에는 항상 태부족("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 당시 지도자 한 분의 증언)이었지만, 부족한 식량이라도 항상 같이 나누어 먹고 살았다. 일제 탄압을 피해 뜻을 같이 하는 신앙인들, 특히 강제징집을 피해서 이곳에 피한 청년들은 배급은 받을 수 없었지만, 숫자가 늘어나서 모두가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독이 없는 모든 풀을 뜯어 먹었다. 특히 겨울에는 음식을 구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 되어 풀부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했다. 그리하여 주변 소나무 껍질들이 벗겨져 하얀 부분이 흉하게 보였다. 소나무 껍질과 밀가루로 만든 송기떡으로 배고픔을 달래었고, 이것을 먹어 소화시키는 것과 용변을 보는데 어려움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아이들은 화장실 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어른들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식수는 개울물을 사용했고, 교회 주변의 작은 공간들을 텃밭으로 사용하여 배추, 무 등을 심어 재배했다. 초대 교회처럼(사도행전 1:42-47) 유무상통의 생활을 했다. 모두가 오직 믿음으라 만난(萬難)을 극복했고, 작업, 예배 및 성경연구를 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그들의 활발한 전도활동을 통해 수많은 교회를 세우며 지도자를 양성했다. 그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민족혼을 일깨우고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남자 공동막사 터 및 망대
이곳은 남자용 공동막사이고 밑에는 여자들의 공동막사가 있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특히 종교계에 대한 탄압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신사참배, 창씨개명 그리고 교회해산반대 등으로 인한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과 강제징집.징용을 피해 경향 각지에서 이곳에 피신해 온 20~30대 초반의 청년들과 교우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신앙으로 환영했으며 그들을 양육하여 교회 지도자들로 세웠다. 이곳은 열악한 거처였지만, 믿음의 거장들은 꺼지지 않은 불꽃이었다. 교회에서 동남편 방향으로 200여m 떨어진 산 위에 일본 헌병이나 외부인의 접근을 살피는 망대로 쓰였던 돌무더기 유적이 있다.
이곳은 남자용 공동막사이고 밑에는 여자들의 공동막사가 있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특히 종교계에 대한 탄압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신사참배, 창씨개명 그리고 교회해산반대 등으로 인한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과 강제징집.징용을 피해 경향 각지에서 이곳에 피신해 온 20~30대 초반의 청년들과 교우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신앙으로 환영했으며 그들을 양육하여 교회 지도자들로 세웠다. 이곳은 열악한 거처였지만, 믿음의 거장들은 꺼지지 않은 불꽃이었다. 교회에서 동남편 방향으로 200여m 떨어진 산 위에 일본 헌병이나 외부인의 접근을 살피는 망대로 쓰였던 돌무더기 유적이 있다.
가옥터
이곳의 총면적은 망대까지 대략 2500여 평으로 교회와 여러 가옥들을 두었다. 가옥은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집이었고 안쪽에는 흙을 발라 흙벽을 만들었다. 방바닥은 갈대로 깔개를 만들어 깔았다. 크기는 3~4평 되었고, 한 집에 약 4~5명 정도 살았다. 교회 양 옆으로 13채의 가옥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지붕으로 이어 놓은 이엉틀 틈바구니에서 새는 빗물을 피하느라 잠도 못 이루고 밤을 새는 날도 많았다. 부엌이 따로 없었고 양편 끝에 가마솥을 각각 2개씩 놓고 공동으로 사용했다. 화장실은 1평 정도의 남녀 공동 화장실로 북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이곳의 총면적은 망대까지 대략 2500여 평으로 교회와 여러 가옥들을 두었다. 가옥은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집이었고 안쪽에는 흙을 발라 흙벽을 만들었다. 방바닥은 갈대로 깔개를 만들어 깔았다. 크기는 3~4평 되었고, 한 집에 약 4~5명 정도 살았다. 교회 양 옆으로 13채의 가옥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지붕으로 이어 놓은 이엉틀 틈바구니에서 새는 빗물을 피하느라 잠도 못 이루고 밤을 새는 날도 많았다. 부엌이 따로 없었고 양편 끝에 가마솥을 각각 2개씩 놓고 공동으로 사용했다. 화장실은 1평 정도의 남녀 공동 화장실로 북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