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만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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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산5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애족을 심혈로 실천한 애국지사가 여기에 있다. 몸을 던져 항일독립운동에 반평생을 보낸 독립투사 광복후에는 교육으로 민족역량을 키우려던 교육자로서 반평생을 바친 지사가 있으니 조용찬선생이 바로 그 분이다. 선생의 이명은 재 만충 찬 자는참헌 호는 백농이요 관은 하성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신식 학교교육을 받기전에 한학에 통달하였고 문장과 필재또한 탁월하였으며 준수하고 패기에 찬 용모에다 성품은 정의롭고 강직하여 사리사욕을 가장 경멸한 평생을 살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해 구국위해 진력한 공로로 건국훈장이 서훈되었다. 선생의 가계는 신라 태사 창성부원군 휘 속용을 시조로 고려조에 팔평장육소람이 배출된 화문이며 려말 공민왕조에 배행된 좌정승 하성부우너군 배평공 휘 익청을 거친다 그 4대후 장사랑 휘 속조 임당공때 신령에 시거하였고 그 5세손인 증이조참판 휘 경온 임계공은 선생의 11대조가 된다. 6대조는 휘 용적 현조 휘 희직 고조 휘 논경 증조 휘 석규요 조고는 휘 한승 송단공이다. 송단공은 흉년에 굶주린 수백명을 몇달씩 함께 살며 구휼하고 만여평의 농지를 쾌척해 백농학원을 설립하여 신학문을 일깨웠다. 선고는 후 병국 제헌공이며 선비는 풍산유씨 휘 도진의 따님이다. 선생은 1906년 병오 10월 26일 경북 영천시 화남면 현고마을에서 백형 시환 중형 지환에 이어 삼남으로 태어났다. 초년은 백농학원및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찍 일본실상을 파악한 부친의 뜻
에 따라 서울로 이주하여 휘문고보에 진학하였다. 백농학원시절부터 사제간 애국의지를 확인하고 휘문고보에서는 친일교장을 배척하는 격문을 써붙여 제적되고 1925년 대구에서 이정기 이육사및 장진홍등과 구국비밀결사를 하였다. 6.10만세사건후 일제의 음해로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가 고사지경에 처하자 독립운동에 몸바칠 비장한 각오로 이육사와 함께 이정기 동지의 외숙 이완 중국명 공인장군을 찾아갔다. 그를 통하여 북경과 상해에 훝어진 임정요인들을 만났고 다시 임정단합의 전열정비를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자 선생은 정신과 전력의 무장이 우선 과제라 단정하여 군관학교설립을 주창하였고 이에 동감한 이완장군의 노력으로 북경정부의 전적인 지원을 확약받았으나 우리군관학교는 민족자본이 바탕이 되어야한다는 선생의 주장으로 자금마련을 위해 1927년 8월 이육사와 동반하여 비밀리 국내에 잠입하였다. 먼저 선생의 전재를 자금화하고 다른 모금에 나선 결정적 시점에 대구의 폭탄사건으로 전국에 비상경계령이 선포되고 비밀결사 9명이 체포될때 선생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일제는 극악한 방법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을 2년이 넘도록 강행했으니 끝까지 정의를 외치며 항거불복하였다. 이런 와중에 선생의 고향 영천과 이육사의 고향 안동에서 폭탄사건계획이 탄로나 두곳다 당자가 자결하자 백학학원을 주목하고 서만달교사등이 고초를 받고 사직했다. 엄중한 보도관제속에서도 소문은 전국에 퍼지면서 일제는 더욱 악랄해졌고 장진홍이 대판에서 잡혀와 끝까지 단독거사라고 주장하며 재판중에 판사에게 의자를 던지는등 항거하여 밤마다 옥중에 만세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런 결과로 선생에게 가학은 일년여 더 지속되었고 장진홍열사는 사형집행 전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옥중 과세3년에 출옥후 와병 중에도 선생은 중국으로의 탈출을 꾀하였으나 계유년 정월 자식의 옥바라지에 화병을 얻어 부친이 타계하고 5월에 백형이 운명하니 연이은 상사는 출천의 효우를 이상으로 했던 선생에게 청천병력으로 다가와 독립운동전선으로의 출가를 멈추게 하였고 후반의 생애가 육영사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아 향민들의 탄호하는 모습을 보며 선생은 왜적에게 설분하는 길은 문명강국의 건설이며 그것은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향민을 교육할 상급학교 설립을 위하여 주위를 설득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나 산동중고등학교가 조기에 창설된것도 선생이기에 가능하였으니 항시 명예와 영광은 남에게 돌리고 노력과 무언의 실천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선생은 분명 영원히 우리가슴에 남을 사회의 횃불이었다. 학교
법인 경영에 마지막 심혈을 쏟던 1990년 5월 5일 경오 4월 1일 향년 85세로 장거하니 몸소 앞들을 옥토로 일궈낸 숲뒤 못 굽어보며 꿈에 용이 승천했다는 양강소 덤바라보이는 소원당자좌에 상례하였고 5년후 을해9월 21일 배위가 향년 90세로 쌍분부좌하니 광산김씨 휘 희흥의 따님이라.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규는 승용 중용 차남 규락은 딸 민정 3남 규열은 우용과 두 딸 윤아 윤경을 두었고 장녀 태희는 이병와사이에 상건 상경 남매 차녀 옥은 이주원사이에 창선 유선과 딸 윤정을 두었고 이어 손자 승용이 딸 영서를 중용이 영준 영민을 두었는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애국은 국민의 도리일뿐이라고 공로포상 신청을 생시에는 거론조차 완거하던 조용찬선생! 선생의 조국광복과 교육에 바친 감사봉공의 충의로운 절조와 청렴한 선비정신은 우리민족의 번영과 함께 귀감으로 살아 영원하리라
오른쪽에 보이는 붉은 지붕이 삼창우드빌이다.
처음에 보았던 삼창우드빌의 뒤쪽이 아니고, 우드빌의 오른쪽에 있는 길로 올라오면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곳의 GPS 상의 주소는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산 56이다.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현고마을 뒷산 소원당 애국지사 백농 조용찬(조재만, 조충환) 묘를 찾고 있다.
위성지도에서 저 삼창우드빌 뒤쪽에 보이는 묘를 애국지사의 묘소로 간주하고 찾아가고 있다.
삼창우드빌 뒷쪽에 많은 묘가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다.
저 멀리 보이는 쌍분이 삼창우드빌 바로 뒤에 있는 위성지도에서 보았던 묘소다.
하지만 그쪽도 아니었고, 반대편 산까지 와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다가, 조용찬 선생 생가 부근에서 다시 물어서 찾아온 곳.
GPS 상의 주소는 화남면 삼창리 734이다.
신문기사에서 본 소원당 재실이다.
소원당 뒤쪽으로 올라와서 보니, 차가 올라올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애국지사 백농 조용찬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