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笑軒鄭公學德追慕碑(소헌정공 학덕 추모비)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정용기 선생의 손자 정희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동료와 제자들이 세운 것이다.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정용기 선생의 손자 정희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동료와 제자들이 세운 것이다.
금수강산의 힘찬 정기를 받아 태백산 줄기줄기 구비쳐 내린 교남은 양남선시의 고장 수많은 유학자와 명현달사도 많이 배출되었고 한편 팔공산과 보현산이 둘러쌓인 영천군 자양면에 조선왕조의 말기에 국명으로서 충효동으로 추존을 받은 그 주가인 충효가문의 정통을 이은 소헌정공이 있었으니 휘는 의영이요 자는 중길이며 소헌은 그 히이니 관은 오천이다. 1928년 무진년 7월 20일에 태어나 재성이 출중하여 위사지학으로 학박행총하였으며 이 교계한바 진실로 그 덕과 명예를 숨기고 묵묵히 진중하게 정도를 지켰던 은일군자로서 가위 금세의 고인이라 할수있었다. 근래의 이력만 보아도 퇴계학문을 숭상하는 도운
회를 이끄는 원로 중의 한 분으로 그의 지행이 이미 전국에 알려진 망사로서 대구에서도 또 임진왜란후 400년간 감히 손을 댈수없던 공신사필을 바로 잡아서 현재 310현의 호국의사들에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게 성사시킨 주역이며 또 전국유생들이 동참한 사단법인 염수회의 부설로 덕화여성대학을 창설해서 1기부터 19기까지 수강생을 수료시킴과 덕명학회장으로 그 명성이 저세할뿐 아니라 전국명벌들의 청문을 받아서 찬해준 글들 이 산적해 있는 유고가 타처에서는 보기어려운 양이며 또 그 선대의 충효사적을 선양한 이력등이 탁월한 점등을 참작할때 근세에서는 유례가 없는 선비라 아니할수없다. 수년전에는 영남유가 후손으로 영림회도 창의발족하였고 거년에는 보인학회를 창회하여 공을 학장으로 추대하였으며 보인은 논어중에 증자왈 "以文會友 以友輔仁"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오등이 수불민하나 명색이 유가의 고벌로서 선참해서 종유동락하는 뜻에서 보인학회를 구성창회하여 일익발전하던중 지난 2004년 갑신년 7월 26일에 공이 타계하니 회우와 후학들은 짝을 잃은 기러리요 장수를 잃은 병사가 되어 이 애도함을 비에 새겨 이곳 충효동은 산남의진의 발상지요 충효재는 공이 생시에 추모하였던 동엄공 단오공 우공의 선재이며 그 경외에 공의 추모비를 세우니 삼구리 공의 유택에서 찬서리와 이슬의 향내를 맡으면서 오로내리시고 천국에서 공이여 고이 고이 잠드시옵소서
山南義鎭 鄭大將 兩世出身 忠孝洞 史蹟碑(산남의진 정대장 양세출신 충효동 사적비)
산남의진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출생지인 검단리를 충효동이라 하고 그 사적을 기록한 비
산남의진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출생지인 검단리를 충효동이라 하고 그 사적을 기록한 비
이 고장 검단리를 충효동으로 이름한 것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신 선열양세의 충효사적을 기려서이니 그는 곧 산남의진 총수 동엄 정환직 선생과 그 아드님인 단오 정용기 대장이다.
이 양세는 영일정씨 이니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은 방선조요 임진왜란때 향병을 이끌고 영천성을 다시 찾은 호수 정세아 의병장 은 파선조 로 국난의 고비마다 충절로 이어진 선비의 집안이다.
동엄 선생은 소년시절에 이미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휘장을 날리고 출사하여 북부도사 의금부도사 사헌부 감찰순무대 참모관 이어서 태의원전의가 되고 호군당상관에 올라서 순무사겸 토포사로 구월산 난도들을 선무하니 그들은 선생의 인품에 감복하여 스스로 흩어졌다. 청일전쟁에는 완전사로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시찰사 이어서 도찰사가 되어 탐관오리를 숙정하고 궁내부 별입시 중추원 의관등을 역임하여 궁중화재때는 기발한 조치로서 황제를 보호하여 옥배옥수에 이름과 자호와 초상화 와 금은패물 등의 하사품 이 내렸다. 천품은 정의롭고 기상은 추상같아 일본공사에게 무례한 내정간섭을 여러번 글로서 꾸짖고 시국수습방안 을 상소하고 친일역도 들을 경고하는 등으로 선생이 남기신 저서는 모두 나라 걱정에 대한 글 뿐이다.
단오공은 한때 혜민원 총무를 잠시 지냈을 뿐 일생을 구국운동 에 바친 우국지사로 경향간을 오르내리며 찾아
이 양세는 영일정씨 이니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은 방선조요 임진왜란때 향병을 이끌고 영천성을 다시 찾은 호수 정세아 의병장 은 파선조 로 국난의 고비마다 충절로 이어진 선비의 집안이다.
동엄 선생은 소년시절에 이미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휘장을 날리고 출사하여 북부도사 의금부도사 사헌부 감찰순무대 참모관 이어서 태의원전의가 되고 호군당상관에 올라서 순무사겸 토포사로 구월산 난도들을 선무하니 그들은 선생의 인품에 감복하여 스스로 흩어졌다. 청일전쟁에는 완전사로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시찰사 이어서 도찰사가 되어 탐관오리를 숙정하고 궁내부 별입시 중추원 의관등을 역임하여 궁중화재때는 기발한 조치로서 황제를 보호하여 옥배옥수에 이름과 자호와 초상화 와 금은패물 등의 하사품 이 내렸다. 천품은 정의롭고 기상은 추상같아 일본공사에게 무례한 내정간섭을 여러번 글로서 꾸짖고 시국수습방안 을 상소하고 친일역도 들을 경고하는 등으로 선생이 남기신 저서는 모두 나라 걱정에 대한 글 뿐이다.
단오공은 한때 혜민원 총무를 잠시 지냈을 뿐 일생을 구국운동 에 바친 우국지사로 경향간을 오르내리며 찾아
국권회복을 도모 정부의 실정을 탄핵하기도 하고 때때로 종로에서 민족단결의 열변을 토하며 노래와 시로써 비분을 달래고 국채보상운동 에도 앞장서며 큰일 할 때를 기다렸다.
나라운수는 침략자 일본국의 계획적인 농간으로 점점더 기울어져 가더니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들의 흉계가 적신들과 내통되어 一九○五년에는 끝내 을사보호조약 을 당하여 주권을 송두리째 빼았기자 고종황제 를 가까이서 모시던 동엄 선생은 황제의 밀령을 품고나와 나라를 지킬 최후수단 으로 무력항쟁 을 계획 주도할새 단오공 은 그뜻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피끓는 격문으로 의열지사들을 모아 산남대의진 을 창군 그로부터 줄곧 일본군의 정벌에 들어갔다.
의진의 전성기에는 각 고을마다 분진을 두었으니 규모가 방대했음 을 알 수 있으며 기록상 전하는 격전만도 五七회이니 항쟁의 치열했음 도 알 수 있다. 흥해와 청하는 세 번씩 함락하여 소굴을 불살랐고 장기 청송 의성 의흥 신령 등도 무기를 노획하고 혹은 불살랐다.
신성 건천 자양 북안 신광 기북 및 주사산 비학산 남동대와 북동대에서도 크게 이겼으며 월매 두마 상하옥 영양 영덕 운문산 등에서도 잘 싸웠다. 불리했던 싸움은 영덕 유암과 청송 고아실 및 팔공산 접전으로 많은 의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천과 도평의 혈전에서도 냇물을 붉게 물들였으며 운주산 전투에서는 안국사를 태웠고 보현산 전투에서는 비상사를 태웠다. 입암 전투에서는 단오정대장이 이한구 중군과 손영각 참모를 더불어 순국 장령이 무너지므로써 의진이 한때 흩어지기도 했다.
총수 동엄 선생은 의진을 다시 규합 백발을 휘날리며 노도와 같이 여러 고을의 적을 격파했으나 청하에서 사로잡히어 대구로 호송 적장의 만단유세 를 뿌리치고 영천으로 환송되어 조양각 아래서 『이몸이 죽은들 마음이야 변할소냐 대의가 무거울 뿐 죽음이야 가볍도다. 나의 뒤를 그 누구에게 부탁할꼬. 뜻을 못전하고 임종이 닥아 오다.』 라는 임종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총수 유명으로 최세한이 지휘권을 이엇더니 그로부터 의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영의 남북전역에 흩어져 곳곳마다 서릿발치는 항쟁사를 남기고 살아남은 의사들은 지하운동으로 들어가서 조국 삼천리와 대륙만리를 휘날리면서 투쟁을 계속하여 광복을 맞았다.
돌아볼 때 이산천 어디엔들 의사들의 피로 물들여지지 않은 곳이 있으랴! 그러나 모두가 어떤 명예나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다. 의병에 꼭 가야할 의무도 없었다. 무기나 옷이나 군량을 보급해 주는 기관도 없었다.오직 끓어 오르는 구국 일념으로 산과 들을 누비면서 싸우다가 초개와 같이 생명을
나라운수는 침략자 일본국의 계획적인 농간으로 점점더 기울어져 가더니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들의 흉계가 적신들과 내통되어 一九○五년에는 끝내 을사보호조약 을 당하여 주권을 송두리째 빼았기자 고종황제 를 가까이서 모시던 동엄 선생은 황제의 밀령을 품고나와 나라를 지킬 최후수단 으로 무력항쟁 을 계획 주도할새 단오공 은 그뜻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피끓는 격문으로 의열지사들을 모아 산남대의진 을 창군 그로부터 줄곧 일본군의 정벌에 들어갔다.
의진의 전성기에는 각 고을마다 분진을 두었으니 규모가 방대했음 을 알 수 있으며 기록상 전하는 격전만도 五七회이니 항쟁의 치열했음 도 알 수 있다. 흥해와 청하는 세 번씩 함락하여 소굴을 불살랐고 장기 청송 의성 의흥 신령 등도 무기를 노획하고 혹은 불살랐다.
신성 건천 자양 북안 신광 기북 및 주사산 비학산 남동대와 북동대에서도 크게 이겼으며 월매 두마 상하옥 영양 영덕 운문산 등에서도 잘 싸웠다. 불리했던 싸움은 영덕 유암과 청송 고아실 및 팔공산 접전으로 많은 의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천과 도평의 혈전에서도 냇물을 붉게 물들였으며 운주산 전투에서는 안국사를 태웠고 보현산 전투에서는 비상사를 태웠다. 입암 전투에서는 단오정대장이 이한구 중군과 손영각 참모를 더불어 순국 장령이 무너지므로써 의진이 한때 흩어지기도 했다.
총수 동엄 선생은 의진을 다시 규합 백발을 휘날리며 노도와 같이 여러 고을의 적을 격파했으나 청하에서 사로잡히어 대구로 호송 적장의 만단유세 를 뿌리치고 영천으로 환송되어 조양각 아래서 『이몸이 죽은들 마음이야 변할소냐 대의가 무거울 뿐 죽음이야 가볍도다. 나의 뒤를 그 누구에게 부탁할꼬. 뜻을 못전하고 임종이 닥아 오다.』 라는 임종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총수 유명으로 최세한이 지휘권을 이엇더니 그로부터 의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영의 남북전역에 흩어져 곳곳마다 서릿발치는 항쟁사를 남기고 살아남은 의사들은 지하운동으로 들어가서 조국 삼천리와 대륙만리를 휘날리면서 투쟁을 계속하여 광복을 맞았다.
돌아볼 때 이산천 어디엔들 의사들의 피로 물들여지지 않은 곳이 있으랴! 그러나 모두가 어떤 명예나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다. 의병에 꼭 가야할 의무도 없었다. 무기나 옷이나 군량을 보급해 주는 기관도 없었다.오직 끓어 오르는 구국 일념으로 산과 들을 누비면서 싸우다가 초개와 같이 생명을
바쳤다. 그 살신성인이 대를 이었다. 이가 충효동의 사적이다. 이 숭고한 고장에 사적비를 세워서 나라와 겨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하는 겨레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져 한다.
상단에는 당시 종군한 의사들의 고귀한 이름을 다 밝혀낼 수가 없어서 확인된 의사만을 기록했으나 전하지 못한 수 많은 의사들의 넋도 함께 모시노니 님들의 높고 매운 얼 모두 여기 강림하시어 저 아름다운 산과 들을 굽어 보시며 길이 겨레의 숭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 고장 충효재는 의진 항쟁시에 소실당한 검계서당 자리다.
일제때에 생존이사들이 모은 참동계 돈으로서 서당을 다시 짓는다는 구실로 세워져서 국내외 항일 지하운동의 연락이 끊임없이 오고간 정대장 부자의 추모재이다. 그러므로 一九八七년도 국가에서 보수비를 영달하여 영천군수로 하여금 묘소와 함께 다시 다듬고 이어서 충효동 명명 八○주년인 一九八八年 五月 二○日
경상북도지사 李相培 근수
대구지방보훈청장 李善五 근찬
선열양세사손 鄭喜永 근서
상단에는 당시 종군한 의사들의 고귀한 이름을 다 밝혀낼 수가 없어서 확인된 의사만을 기록했으나 전하지 못한 수 많은 의사들의 넋도 함께 모시노니 님들의 높고 매운 얼 모두 여기 강림하시어 저 아름다운 산과 들을 굽어 보시며 길이 겨레의 숭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 고장 충효재는 의진 항쟁시에 소실당한 검계서당 자리다.
일제때에 생존이사들이 모은 참동계 돈으로서 서당을 다시 짓는다는 구실로 세워져서 국내외 항일 지하운동의 연락이 끊임없이 오고간 정대장 부자의 추모재이다. 그러므로 一九八七년도 국가에서 보수비를 영달하여 영천군수로 하여금 묘소와 함께 다시 다듬고 이어서 충효동 명명 八○주년인 一九八八年 五月 二○日
경상북도지사 李相培 근수
대구지방보훈청장 李善五 근찬
선열양세사손 鄭喜永 근서
경북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 충효재. 1906~1908년까지 산남의진의 대장으로 활약한 정환직, 정용기 부자가 살던 곳이다.
1933년 3월 산남의진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 의병장을 추모하는 추모계와 생존 의사들의 지하조직이던 삼동계에서 서당복원을 내세워 정대장 양세의 추모각으로 건립하여, 광복시까지 외관상 시골의 한적한 서당같이 보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수많은 생존 의사들의 연락이 국내외에 오고간 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1933년 3월 산남의진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 의병장을 추모하는 추모계와 생존 의사들의 지하조직이던 삼동계에서 서당복원을 내세워 정대장 양세의 추모각으로 건립하여, 광복시까지 외관상 시골의 한적한 서당같이 보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수많은 생존 의사들의 연락이 국내외에 오고간 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