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로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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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29-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兵大將 後隱 李學魯 先生 紀念碑(의병대장 후은 이학로 선생 기념비)
여기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좌시할 수 없어 벼슬을 던지고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무찔렀으며 국치를 당하자 「망한대」를 쌓고 통곡하다가 왜경에게 피체되어 10년형을 받았고 광무황제의 국상을 당한 뒤 한 평생 백립을 벗지 않았던 애국선열 한 분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의병대장 후은 이학로 선생이시다. 선생은 벽진이씨로 고려 개국원훈 벽진장군 염언과 진현관 대제학 문안공 산화 선생 견간과 이씨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분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정간공 경은 맹전의 후손이요. 성균생원으로 조지산 문하에 종유하여 학덕이 높았던 대암 희백의 11세손이다. 증조는 벌암 기현이니 문행이 있었고 조는 瀧(롱)이요, 고는 정봉이니 모두 은덕이 있었으며 비는 문화류씨니 사인 동영의 여요, 서산자미의 후손으로 壺德(호덕)이 있었다. 선생은 철종 10년 을미(1859) 10월 초 8일 영천군 자양면 토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준하고 효성이 지극하더니 6세에 內艱喪(내간상)을 당하고 계모 경주김씨를 섬겼는데 김씨는 항상 「우리 아들의 효성은 하늘이 내었다.」고 하였다. 삼종형 구암공에게 수학하여 문학이 성취되었고 커서는 기백이 높고 도량이 컸으며 지용이 뛰어나고 지절이 굳었다. 광무 9년 을사
여기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좌시할 수 없어 벼슬을 던지고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무찔렀으며 국치를 당하자 「망한대」를 쌓고 통곡하다가 왜경에게 피체되어 10년형을 받았고 광무황제의 국상을 당한 뒤 한 평생 백립을 벗지 않았던 애국선열 한 분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의병대장 후은 이학로 선생이시다. 선생은 벽진이씨로 고려 개국원훈 벽진장군 염언과 진현관 대제학 문안공 산화 선생 견간과 이씨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분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정간공 경은 맹전의 후손이요. 성균생원으로 조지산 문하에 종유하여 학덕이 높았던 대암 희백의 11세손이다. 증조는 벌암 기현이니 문행이 있었고 조는 瀧(롱)이요, 고는 정봉이니 모두 은덕이 있었으며 비는 문화류씨니 사인 동영의 여요, 서산자미의 후손으로 壺德(호덕)이 있었다. 선생은 철종 10년 을미(1859) 10월 초 8일 영천군 자양면 토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준하고 효성이 지극하더니 6세에 內艱喪(내간상)을 당하고 계모 경주김씨를 섬겼는데 김씨는 항상 「우리 아들의 효성은 하늘이 내었다.」고 하였다. 삼종형 구암공에게 수학하여 문학이 성취되었고 커서는 기백이 높고 도량이 컸으며 지용이 뛰어나고 지절이 굳었다. 광무 9년 을사(1905)에 영희전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때는 왜적의 협박으로 소위 보호조약이 체결되던 시기
였다. 선생은 벼슬을 던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애국동지를 규합하하더니 융희 2년 무신(1908) 3월에 박동의, 서명국, 손재식, 장우만, 송경도, 김동신 등 동지와 경남 일대에서 의병 6백여명을 모집하고 부서를 정하니 박동의는 대장이 되고 선생은 부장이 되었다. 높이 기치를 들고 경남 각읍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동년 8월에 선생이 대장으로 추대됨으로써 사기는 가일층 진작되어 산청에 있던 왜의 헌병수비대를 격파하고 익년 2월에 또 왜의 합천 주둔군을 격파하였으며 4월에 함안으로 진병하여 군화시장에 경고문을 붙이고 왜의 수비대에 발송함으로써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6월에 칠원의 왜인들을 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무기를 포획하였으며 9월에 왜인관리를 사살하고 무기와 기밀문서를 노획하였고 10월에 의령의 왜상인을 11월에는 고성에서 왜의 세리를 습격하고 세금을 압수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는 한편 백여명의 병력으로 왜의 진주 분견대를 격파하였고 다시 지리산 지구의 문태수 의병장과 합세하여 함안으로 진격하였으나 때마침 유한풍의 계절이라 날씨는 춥고 장병들은 피곤하여 수많은 왜적들의 신무기 앞에는 중과부적이라. 부득이 장병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후일을 기다리던 중 융희 4년 경술(1910)에 국치를 당하자 가야산 염석봉에 「망한대」를 쌓고 통곡하면서 「望眼遥穿漢北來江山遺恨且銜盃」(한양 바라보는 눈 뚫어질 듯 하구나! 이 강산 끼친 한을 술잔으로 달래보세!)란 시구를 남겼다. 을미년(1919)에 광무황제가 붕어하자 선생은 종신토록 백립을 벗지 않았는데 이 사실은 이제서의 〈호관자전〉이나 류소민의 〈祭先生文〉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불행히 왜경에게 피체되어 10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갑자년(1924)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와병중에도 후진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 임종때 자질과 제자들에게 명하여 「光武遺臣李學魯之柩」(광무황제의 끼친 신하 이학로의 널)라고 명정을 쓰게 하고 갑술년(1934) 10월 초 11일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니 묘는 池內門山長嶝甲坐(지내문산장등갑좌)에 있다. 배는 증유인 수원김씨니 사인 덕의 여로 부덕이 있었고 묘는 합분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남은 기창, 기명이요. 서는 부계예 동환이며 기창의 남은 종남, 종욱, 종준이요, 서는 월성 김찬권, 밀양박 동홍이며 기명의 남은 종철, 종윤이요. 서는 경주 이희근, 현풍 곽홍준이다. 종남의 남은 철순, 성순이요. 종욱의 남은 용순, 인순, 우순이며 종준의 남은 익순, 항순, 극순이고 종철의 남은 혁순, 기순이며, 종윤의 남은 승재이다. 오호라.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지
2년만에 조국이 광복되었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30년만에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내렸으며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빛나는 공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이 돌을 다듬고 나에게 글을 명해온 것이다. 비록 만시지탄을 금할 길이 없으나 추모의 정성으로 삼가 그 날의 사적을 적고 노래한 장을 바친다.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웁기에 사람은 언제나 의를 지켰지요.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셨네!
일월과 같이 빛나는 그 정신 그 공적을 언제나 자랑으로 받들면서 나라 지키오리다.

대한민국건국 43년 경오 윤 5월 일 후학 대한광복회장 전주 이강훈은 삼가짓다.
후학 안동 권혁택은 삼가제면하고
후학 광주 노재환은 삼가음기하여
대한민국보훈처는 삼가세우다.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29-1 의병장 후은 이학로 선생 기념비
義兵大將 後隱 李學魯 先生 紀念碑(의병대장 후은 이학로 선생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