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필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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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신덕리 22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추암선생 공적비
팔공산의 맑은 정기가 맺힌 영천군 신녕면 신덕리에 1860년 10월 초 6일 민족의 큰 별이 나타났으니 이 분이 곧 일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혈성을 바치신 애국지사 추암 선생이시다. 선생의 휘는 동필이요. 자는 준여요. 호는 추암이요 성은 김씨요 관은 상원이시다. 공의 휘는 명진이요 관은 녕변부사요 모는 진주하씨 억만의 따님이시다. 선생은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시니 용모가 준수하고 기국이 ?천하더니 생원시에 합격하여 관이 궁내부 내사과장이 되었을 1905년에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총칼을 앞세워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니 오천년 역사 속에 비분강개하고 통곡할 일이 또 있엇으랴. 선생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유약소를 설치하여 전국 유림에게 대동단결을 호소하니 뜻있는 거유들이 13도에서 263인이 참석하여 선생을 유림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그해 11월에 고종 황제에게 을사보호조약의 무효임을 아뢰기를 3차요. 임권조 일본 공사와 이등박문 일본 전권대신에게 무력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임을 담판하였으며 독일 영국 프랑스 공사에게 우리나라의 자치권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3차나 발송하였으며 전국유림에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호소하며 온 국민에게 알리게 하였으니 이로 인해 독립운동의 햇불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으며 1907년 라인영 오기호 등과 합심하여 이완용을 위시한 매국오적을 살해하고자 오적암살단을 결성하여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누차 실패하였고 또한 서울 우정국 연회석상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을 지휘 조종한 죄로 체포되어 10년의 유형을 당하였으며 자신회를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일진회의 개 같은 놈들을 추상같이 꾸짖었으며 1909년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세계만국평화회담에 고종의 밀령을 받들고 대한제국대표로 선생과 김진구를 임명하여 극비리에 출국을 도모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출국치 못하고 유약소 회원인 이준 이위종 이상설에게 위임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의 억울함과 일제의 악랄한 침략야욕을 세계만방에 알리도록 하였으며 1910년 만주 해삼위 대동공보사에 신덕리 한들논 60두락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으로 희사하니 이로인해 안중근 의사의 사건에 연류되어 가혹한 취조와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무릎의 뼈가 부서지고 살이 허옇게 나왔지만 결코 굴하지 않으시고 당당히 대의를 들어 제국주의의 대죄를 통쾌하게 꾸짖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니 세인들은 송의 문천상의 정기에 비견하였다. 15년의 구형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사삭여만에 석방이 되었다. 그로인해 일경의 감시가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내 한 목숨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노라 하시고 분연히 일으나 일제의 갖은 만행을 샅샅이 살피시고 한편으로는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나 고령과 옥고에 당한 상처를 견디지 못하여 목메어 그리든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1944년 충청도 대덕에서 유명을 달리하시니 향년이 84세라. 배는 파평윤씨 학진특평의 따님이시다. 오호라 선생이 순국하신지 38년이 지난 1982년 국가 보상 규정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게 되었으니 늦으나마 선생의 유지를 흠모하는 동민일동의 노력과 소문호 영천시 의회 의원의 협조로 영천시로부터 일천만원의 보조금을 받아 선생의 우국충정의 숭고한 뜻을 천추에 길이 길이 추모코자 이 곳 신덕리에 작은 돌을 세워 새기노라.
영천시 신녕면 신덕마을에 있는 김동필 선생 공적비를 찾았다.
하지만 영천신 청통면에도 신덕1리, 신덕2리가 있고, 신녕면에도 신덕1리, 신덕2리가 한자도 같은 이름으로 있다고 한다.
몇 군데를 묻고 물어 영천시 신녕면 신덕2리 마을입구에 멀리 비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