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학리 20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보려한다. 공은 고려 문괴 벽상 삼한 삼중대왕 검교상장군 능성 구존유 시조공은 25대조요. 문하 좌정승 면성부원군 문절공 휘 홍은 두문충현으로 분파조며 휘 봉영은 퇴계 이황 문인 충정 전라 양도 관찰사 광국공훈으로 순조 조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호 백담 시 문단공의 12세손으로 1882년(고종 임오) 9월 10일에 영천시 고경면 학동에서 부 연길 모 김해 허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언행이 바르고 성품이 강직하여 남에게 뒤지기를 싫어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다. 10세에 권오준 훈장에 수학하였으며 20세가 넘을 때 나라 형편은 날로 기우러졌다. 때에 김녕 김씨 김영길의 장녀와 결혼 공은 의병동료들과 영천 경주 영일동해지역을 화승총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친지를 찾아 모금하고 부호와 친일파 집은 강제늑탈하여 의병의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포항경찰서에 3년 구금되었다. 다시 1909년 일인 재판장의 15년형의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 1924년에 반신불수로 만기 출소 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옥고에 지친 공은 3일 후인 동년 9월 8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41세이다. 후사는 종손 자문을 세웠다. 일제침략의 교묘한 마수는 공의 엄연한 국국의거를 강도와 절도로 몰아 침소봉대하며 감옥살이를 시켰다. 대한제국 안에 일인재판장이 법을 다스리던 시대이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공은 이런 시대에 불행하게 살다 갔으나 광복을 맞이하자 그 높은 뜻과 빛나는 애국행적이 밝혀지니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며 그 공훈을
기리게 되었다. 다시 이 고장에서는 시민 유지와 유족이 합심으로 공의 유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추모비를 세워 공의 거룩한 삶을 천추에 길이 빛내고저 하는 바이다.
영천시 고경면 학리 184 애국지사 구봉서의 생가를 찾아 묘소 위치를 물어보기 위해서 찾았다.
해당 번지에는 집이 없어졌고, 묘소는 마을 생가 바로 앞에 있다고 한다.
해당 번지에는 집이 없어졌고, 묘소는 마을 생가 바로 앞에 있다고 한다.
능성 구봉서 선생 추모비를 찾아가고 있다. 생가터 앞에 있는 저주지 옆이다.
GPS 상의 주소는 영천시 고경면 학리 207이다.
GPS 상의 주소는 영천시 고경면 학리 207이다.
같은 장소에 추모비가 있다.
상당 애국지사 능성 구봉서 추모비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충신이 나오는 법이니 조선조말기에 국운이 기우러서 일제의 침략이 날로 심해갈 때 목숨바쳐 싸운 우리 애국자는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을사보호조약 후 5년만에 경술국치를 당함에 민족의 사는 길을 죽음에서 찾은 충신 국권회복을 꾀하던 의병 지하에서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펴던 애국지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이들을 도와 일제 질곡에 항거한 용사가 또한 얼마였던가? 여기에 구봉서(具鳳書, 鳳瑞)는 송영조와 더부러 의병을 돕기 위해 자금조달책으로 신돌석 휘하에서 활약 중 일경에 체포되어 18년의 옥살이를 한 분이다. 이제 공의 그 행적을 들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