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376-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복공원(大韓光復團 紀念公園)
대한광복단기념공원
공원안내도
[범례] ❶ 대한광복단 기념관 ❷ 국기게양대 ❸ 대한광복단 추모탑 ❹ 대한광복단 기념비 ❺ 광복탑 ❻ 국가유공자 충혼탑 ❼ 무공수훈자 전공비 ❽ 평화통일 기원탑 ❾ 연못 ❿ 풍기체육회관 ⓫ 축구경기장
[범례] ❶ 대한광복단 기념관 ❷ 국기게양대 ❸ 대한광복단 추모탑 ❹ 대한광복단 기념비 ❺ 광복탑 ❻ 국가유공자 충혼탑 ❼ 무공수훈자 전공비 ❽ 평화통일 기원탑 ❾ 연못 ❿ 풍기체육회관 ⓫ 축구경기장
대한광복단약사비와 소몽 채기중 선생 일대기가 건립되었다고 언론에는 나와 있었는데,
가운데 있었던 대한광복단약사비가 새롭게 바뀐 것이었다.
가운데 있었던 대한광복단약사비가 새롭게 바뀐 것이었다.
앞면은 대한광복단 약사가 새겨져있고, 뒷면에는 채기중 선생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단은 1913년 정월 경상북도 풍기에서 창설되었다. 초기 단장인 소몽 채기중과 동지들의 약 1년여 집중적인 조직사업의 결과였다. 이로써 民國(민국)을 지향하며, 무장투쟁을 통한 對日대일 獨立戰爭(독립전쟁)을 준비.이행하는 革命機關(혁명기관)이 처음으로 광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국내에 탄생한 것이다. 대한광복단은 처음부터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조직이었으며,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국내의 강점세력에 대해 정면투쟁을 선포하며, 거의 10년간 그 세력을 유지했다는 의미에서도 대한광복단은 독립전쟁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정하고 있다. ■1. 시대적 배경과 목적 : 일제의 침략야욕이 나라를 덮쳐오던 시기,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10 정미의병까지 군대로 조직되어 수많은 전투에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그러나 결국 현대식 무기에 압도당하고 만 義兵戰爭(의병전쟁)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07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되어 共和制(공화제)를 추구하던 新民會(신민회)의 활동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가 첨예화하던 1909년부터 조직이 무너지는 1911년까지 점차로 해외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대한광복단은 이러한 두 가지 큰 흐름의 정신을 계승하여 군대양성을 위한 군자금 확보, 악질 일인과 친일 모리배의 처단, 궁극적으로는 일제를 몰아내고 자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2. 초기 결성과정 : 채기중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해 갔다. 만주를 여러번 드나들던 그가 1912년 봄에 서간도에서 趙聖鎬(조성호)에게 거액 500원을 건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동지규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극적인 조직사업은 1912년 봄 이후이다. 의병장 출신 지사들, 젊은 용사들, 풍기 주변의 지인들이 참여했다. 채기중은 冒險勇士隊(모험용사대)의 양성에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 80여 명의 인원이 확보되었다. 이 시기 충북 제천의 근북면 면사무소 습격, 영월의 중석탄광 잠입, 친일부호들의 금고탈취 등이 단행되었다. ■3. 재정기반과 동지규합 : 채기중, 김원식, 정성산 세 사람이 재산을 내놓았고, 팔도에서 모인 유창순, 장두환, 유장렬, 김병렬, 한훈, 정운기, 정진화, 강순필, 김상옥, 정만교 등이 창립 단원으로 참여하였다. 양제안, 양한기, 양한위 삼부자와 예산의 김한종 등은 이름을 알리지 않은 채로 협조하고 있었고, 충청.전라.평안도의 지사들이 지속적으로 영입되었다. 1914년에는 밀양의 황상규, 김대지 등이 합유하였고 단원 수가 거의 200에 달했다고 한다. ■4. 영주 대동상회, 풍기학교훈도인 박제선, 춘양교원 류명식, 박계양, 정의국, 이교덕, 권영목 등을 통해 풍기, 순흥, 영주, 춘양, 내성의 자산있는 이들을 망라하여 영주읍내에 대동상점을 차렸다. 금고는 권영목이 관리하였으며, 여기서 모인 자금 수만원은 안동에 두었다가 만주를 통해 무기를 구입하였다. ■5. 군대식 조직개편과 광복회 : 1915년 소몽 채기중과 고헌 박상진의 만남은 조직의 새로운 전기를 이루었다. 양제안의 조언으로 박상진은 이복무와 함께 풍기의 채기중을 방문하였고, 이들의 의기투합으로 대한광복단은 군대식으로 재편성되며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로 거듭난다. 박상진을 총사령, 이석대를 부사령으로 하고 각 지역의 지부가 결성되었다. 지부장은 경기 김선호, 황해 이관구, 강원 김동호, 평안 조현균, 함경 최봉주, 경상 채기중, 충청 김한종, 전라 이병찬 등이 맡았다. 12월에는 만주 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가 설립되었다. 이석대가 전사한 뒤에는 김좌진이 부사령을 맡았다. 채기중과 박상진은 수시로 연락하며 모험용사대와 연결하였으며, 대구의 상덕태상회.영주의 대동상회 등이 거점역할을 하였다. ■6. 대한광복단 재건, 박상진 등이 6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조직의 정체기가 오자 채기중, 한훈, 노백린, 김좌진, 홍현주, 기병섭 등이 1916 조직을 재정비하여 다시 대한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7. 친일 악질관리의 처단, 1917년 11월에 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엄세규가 경북 칠곡의 악질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고, 12월에는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김한종, 장두환 등이 주관하여 처단하였다. 이로써 광복단과 광복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일경은 발칵 뒤집혔으나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8. 지도부의 체포 : 일경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미끼를 던졌던 바, 결국 천안의 이종국이 밀고하였다. 1917년 12월 16일에 충청지부장 김한종이 20일에는 총사령 박상진이 체포되었다. 그래도 충청과 전라에서의 군자금 모금활동은 지속되었다. 그러다 이듬해 7월에 목포에서 채기중이 체포되고 이어서 다른 많은 임원들이 체포되었다. 주요간부들이 1921년 8월에 사형당하며 주류부대는 와해된다. ■9. 독립전쟁사에 끼친 영향, 국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독립투사들이 있었다는 믿음은 삼일운동이라는 거대한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1918년 말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명 중 세 명 이상이 광복단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밀양출신 황상규와 김대지 등은 1919년에 義烈團(의열단)을 창설하였으며 황상규의 처조카인 김원봉은 특별훈련을 받아 의열단의 지도자로 성장한다. 나중에 독립군과 광복군 형성과정에도 대한광복단 출신이 많이 참가한다. ■10. 대한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 삼일운동이 일어나서 혁명의 분위기가 국내에 확산되고 임시정부가 상해에 서게 됨에 따라 남은 대한광복단 단원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충 강력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보다 먼저 김상옥, 김동순, 한훈 등 20여 명이 결사동맹 행동반인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에 미국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조선총독 齋藤實(사이토 마코토)의 암살 등의 행동으로 민족의 진심을 천하에 알리려 했으나 결행을 하루 앞두고 대부분 적에게 체포되고 김상옥만 상해로 탈출하였다. 김상옥은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0여 일간 일천여 일경들을 전율케 하다 끝내 자결하였다. 이 거사로써 대한광복단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해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 1945년 10월에 한훈 등은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을 위해 대한광복단을 재건하였으나 조국의 분열과 전쟁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조국을 이루는 과제는 우리에게 남겨졌다.
2021년 8월 일,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2021년 8월 일,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선언문〉
우리는 대한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낼 것을 천지신명 앞에 맹세한다.
〈4대 실천강령〉
비밀.폭동.암살.명령
〈행동지침〉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행동.집행.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韓滿(한만)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 鑛務所(광무소)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隨時(수시) 隨處(수처)에서 처단하는 行刑部(행형부)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전국 부호에게 보낸 격고문〉
謨事(모사)는 사람에 달려있고 成事(성사)는 하늘에 있으므로 충의의 선비를 모아 民國(민국)을 조직하고 병사를 기르고 農會(농회)를 開彰(개창)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움은 역시 금전이다. 여기에서 생각 끝에 有志(유지) 자산가들에게 간청하여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이 경고에 위배하거나 불응하지 않으면 첫째는 국가의 행복이요, 둘째는 귀하의 生色(생색)될 것이니, 보통 세상의 예사로운 자들과 동일시 말고, 얼마간의 금액을 며칠까지 준비하여 본회 幹事人(간사인)의 지시를 기다려 서둘러 律令施行(율령시행)과 같이 이행해 주기 바란다. 만일 反動(반동)으로 놀거나 또는 본회원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자 있으면 즉시 본회로부터 결사단을 파견하여 보복할 능력이 완전하므로 십분 유의하기 바란다.
우리는 대한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낼 것을 천지신명 앞에 맹세한다.
〈4대 실천강령〉
비밀.폭동.암살.명령
〈행동지침〉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행동.집행.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韓滿(한만)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 鑛務所(광무소)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隨時(수시) 隨處(수처)에서 처단하는 行刑部(행형부)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전국 부호에게 보낸 격고문〉
謨事(모사)는 사람에 달려있고 成事(성사)는 하늘에 있으므로 충의의 선비를 모아 民國(민국)을 조직하고 병사를 기르고 農會(농회)를 開彰(개창)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움은 역시 금전이다. 여기에서 생각 끝에 有志(유지) 자산가들에게 간청하여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이 경고에 위배하거나 불응하지 않으면 첫째는 국가의 행복이요, 둘째는 귀하의 生色(생색)될 것이니, 보통 세상의 예사로운 자들과 동일시 말고, 얼마간의 금액을 며칠까지 준비하여 본회 幹事人(간사인)의 지시를 기다려 서둘러 律令施行(율령시행)과 같이 이행해 주기 바란다. 만일 反動(반동)으로 놀거나 또는 본회원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자 있으면 즉시 본회로부터 결사단을 파견하여 보복할 능력이 완전하므로 십분 유의하기 바란다.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선생
채기중은 1873년 음력 10월 7일에 경상북도 함창 소암1리에서 부친 채獻洛(채헌락)과 모친 曲阜(곡부) 孔氏(공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선생은 친척의 도움을 받아 한학을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새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민감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언행이 바르고 어른에게 공손했으며 특히 어머니에게는 순종하고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이런 성격은 그가 18세 되던 1891년에 있었던 일에서 잘 나타난다. 그해 8월, 관리들의 횡포에 못 견딘 농민들이 함창에서 민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벌하고 18일만에 종결되는 사건이 있었다. 10월에 집안의 墓祭(묘제)때 모인 어른들이 피해를 본 관리들을 두둔하며 농민들을 규탄하자 뒤에서 선생이 일어나 "아닙니다. 그런 나쁜 관헌은 죽여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한 어른이 나무라자 말없이 뒤돌섰다고 한다. 開城(개성) 高氏(고씨)와 결혼하여 이미 살림을 따로 차리고 논마지기를 일구던 선생이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을미의병의 풍랑 속에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절에 쓴 선생의 시 西망(서망)의 한 구절에서 선생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空殻靑山依舊立 自聲流水爲誰鳴 껍질만 남은 청산 예대로 서있는데, 흐르는 물은 누굴 위해 울고 있는고.
선생은 自警詩(자경시)에 스스로를 표현하기를 "성품이 날카롭고 민첩하며 몸이 비록 장대하지는 않았으나 튼튼하고 순박하며 독학으로 한학을 배우고 구김살 없는 기질에 늘 옛날의 충신열사를 숭배하였다"라고 하였다. 1917년 선생의 손으로 처단한 친일 부호 경상북도관찰사 장승원이 죽기 전에 한 증언 "키가 5척 5촌 정도이고, 얼굴이 둥글고 검으며, 눈이 크고, 상투가 있으며, 상주사투리를 썼다"와 일치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일본군은 상주와 함창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1894년 9월에 상주, 함창, 예천의 농민군이 합세하여 상주읍내의 관아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고, 충북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이 창의하여 전국으로 퍼져간 의병전쟁은 근방의 문경에서 운강 이강년의 부대가 일어나 친일 방백 안동관찰사와 친일 순검들을 효수하는 일로 번졌다. 이러한 세상의 돌아감에 대해 선생은 마을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하고 있었으며, 농민군과 의병들에 대해 공감하는 발언을 자주 하는 선생을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 시기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외출이 잦아졌고 일본군 병참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는 일도 많아졌다. 나이 30 전후해서 그는 가끔 여행을 했다. 선유계곡, 속리산을 다녀왔다고도 하고 또 한번은 예천, 풍기 등을 돌아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영주를 들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 다시 병참부대에 끌려가서 밤새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1906년, 그가 34살이 되던 해, 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동으로 이사를 한다. 주변 사람들과 생각이 맞지 않았고 병참부대에 의해 시달리던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사람들이 모이는 풍기에서 그는 새로운 지식도 접하며 생각도 정리를 하게 되었다. 선생은 1907년 8월의 풍기.순흥전투를 경험했고, 또 11월에는 민긍호 부대의 치열한 죽령전투도 경험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으며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들여 이장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13년에 동부리 雲田운전마을(구름밭마을)로 이사 와서도 1916년까지 이장을 맡았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 1913년에 비밀결사 혁명기관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한위의 기록을 보면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의병잔당과 모험용사를 불러 대사를 도모하는 의기충천한 문사"라고 되어 있다. 또 만주에서 국가의 미래에 대해 상의하려고 碧濤(벽도) 梁齋安(양재안)을 찾아간 젊은 固軒(고헌) 朴尙鎭(박상진)은 그로부터 "진짜 義士(의사)이며 英雄(영웅)인 풍기의 채기중을 만나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선생은 1918년 7월 14일에 전라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주변에서 해외로 망명하라는 권고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으나 선생은 모험용사대의 용의주도함을 굳게 믿어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며, 국내에 일을 두고 떠날 생각은 더우기 없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1919년 2월 28일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22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0년 3월 1일에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음력 7월 8일에 선생은 동지 강순필, 임세규 등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끝으로, 이 시기 선생이 지은 시 두 편만 부분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移拘公州以生字押韻 (공주로 이감되어 생(生)자 운으로 시를 짓다)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백년도 못되는 인생 죽음과 삶이 있는데 누가 죽음답게 죽었으며 누가 삶답게 살았는고.
生欲不生生環死 死當死死死環生 살고자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죽음이 되며,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죽음은 죽음이 오히려 삶이로다.
追謝雲田諸益義捐 (의연금을 내주신 구름밭마을의 여러 벗에게 감사드리다)
惠及縲中難報地 諠爲天下不忘人 은혜가 옥중에 미쳤지마는 보답할 길이 없는 처지이니, 마땅히 천하에서 잊지 못할 사람들이요.
如何移得同人信 化以歸來內外人 어떻게 하면 동지들의 소식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서 죽어서 돌아올텐데,
선생이 살던 풍기읍 동부리 251번지에서는 1960년대 초에 탄환 수천 발이 들은 장독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그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이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채기중은 1873년 음력 10월 7일에 경상북도 함창 소암1리에서 부친 채獻洛(채헌락)과 모친 曲阜(곡부) 孔氏(공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선생은 친척의 도움을 받아 한학을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새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민감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언행이 바르고 어른에게 공손했으며 특히 어머니에게는 순종하고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이런 성격은 그가 18세 되던 1891년에 있었던 일에서 잘 나타난다. 그해 8월, 관리들의 횡포에 못 견딘 농민들이 함창에서 민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벌하고 18일만에 종결되는 사건이 있었다. 10월에 집안의 墓祭(묘제)때 모인 어른들이 피해를 본 관리들을 두둔하며 농민들을 규탄하자 뒤에서 선생이 일어나 "아닙니다. 그런 나쁜 관헌은 죽여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한 어른이 나무라자 말없이 뒤돌섰다고 한다. 開城(개성) 高氏(고씨)와 결혼하여 이미 살림을 따로 차리고 논마지기를 일구던 선생이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을미의병의 풍랑 속에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절에 쓴 선생의 시 西망(서망)의 한 구절에서 선생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空殻靑山依舊立 自聲流水爲誰鳴 껍질만 남은 청산 예대로 서있는데, 흐르는 물은 누굴 위해 울고 있는고.
선생은 自警詩(자경시)에 스스로를 표현하기를 "성품이 날카롭고 민첩하며 몸이 비록 장대하지는 않았으나 튼튼하고 순박하며 독학으로 한학을 배우고 구김살 없는 기질에 늘 옛날의 충신열사를 숭배하였다"라고 하였다. 1917년 선생의 손으로 처단한 친일 부호 경상북도관찰사 장승원이 죽기 전에 한 증언 "키가 5척 5촌 정도이고, 얼굴이 둥글고 검으며, 눈이 크고, 상투가 있으며, 상주사투리를 썼다"와 일치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일본군은 상주와 함창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1894년 9월에 상주, 함창, 예천의 농민군이 합세하여 상주읍내의 관아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고, 충북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이 창의하여 전국으로 퍼져간 의병전쟁은 근방의 문경에서 운강 이강년의 부대가 일어나 친일 방백 안동관찰사와 친일 순검들을 효수하는 일로 번졌다. 이러한 세상의 돌아감에 대해 선생은 마을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하고 있었으며, 농민군과 의병들에 대해 공감하는 발언을 자주 하는 선생을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 시기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외출이 잦아졌고 일본군 병참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는 일도 많아졌다. 나이 30 전후해서 그는 가끔 여행을 했다. 선유계곡, 속리산을 다녀왔다고도 하고 또 한번은 예천, 풍기 등을 돌아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영주를 들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 다시 병참부대에 끌려가서 밤새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1906년, 그가 34살이 되던 해, 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동으로 이사를 한다. 주변 사람들과 생각이 맞지 않았고 병참부대에 의해 시달리던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사람들이 모이는 풍기에서 그는 새로운 지식도 접하며 생각도 정리를 하게 되었다. 선생은 1907년 8월의 풍기.순흥전투를 경험했고, 또 11월에는 민긍호 부대의 치열한 죽령전투도 경험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으며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들여 이장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13년에 동부리 雲田운전마을(구름밭마을)로 이사 와서도 1916년까지 이장을 맡았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 1913년에 비밀결사 혁명기관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한위의 기록을 보면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의병잔당과 모험용사를 불러 대사를 도모하는 의기충천한 문사"라고 되어 있다. 또 만주에서 국가의 미래에 대해 상의하려고 碧濤(벽도) 梁齋安(양재안)을 찾아간 젊은 固軒(고헌) 朴尙鎭(박상진)은 그로부터 "진짜 義士(의사)이며 英雄(영웅)인 풍기의 채기중을 만나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선생은 1918년 7월 14일에 전라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주변에서 해외로 망명하라는 권고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으나 선생은 모험용사대의 용의주도함을 굳게 믿어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며, 국내에 일을 두고 떠날 생각은 더우기 없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1919년 2월 28일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22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0년 3월 1일에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음력 7월 8일에 선생은 동지 강순필, 임세규 등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끝으로, 이 시기 선생이 지은 시 두 편만 부분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移拘公州以生字押韻 (공주로 이감되어 생(生)자 운으로 시를 짓다)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백년도 못되는 인생 죽음과 삶이 있는데 누가 죽음답게 죽었으며 누가 삶답게 살았는고.
生欲不生生環死 死當死死死環生 살고자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죽음이 되며,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죽음은 죽음이 오히려 삶이로다.
追謝雲田諸益義捐 (의연금을 내주신 구름밭마을의 여러 벗에게 감사드리다)
惠及縲中難報地 諠爲天下不忘人 은혜가 옥중에 미쳤지마는 보답할 길이 없는 처지이니, 마땅히 천하에서 잊지 못할 사람들이요.
如何移得同人信 化以歸來內外人 어떻게 하면 동지들의 소식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서 죽어서 돌아올텐데,
선생이 살던 풍기읍 동부리 251번지에서는 1960년대 초에 탄환 수천 발이 들은 장독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그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이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선생은 친척의 도움을 받아 한학을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새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민감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언행이 바르고 어른에게 공손했으며 특히 어머니에게는 순종하고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이런 성격은 그가 18세 되던 1891년에 있었던 일에서 잘 나타난다. 그해 8월, 관리들의 횡포에 못 견딘 농민들이 함창에서 민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벌하고 18일만에 종결되는 사건이 있었다. 10월에 집안의 墓祭(묘제)때 모인 어른들이 피해를 본 관리들을 두둔하며 농민들을 규탄하자 뒤에서 선생이 일어나 "아닙니다. 그런 나쁜 관헌은 죽여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한 어른이 나무라자 말없이 뒤돌섰다고 한다. 開城(개성) 高氏(고씨)와 결혼하여 이미 살림을 따로 차리고 논마지기를 일구던 선생이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을미의병의 풍랑 속에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절에 쓴 선생의 시 西망(서망)의 한 구절에서 선생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空殻靑山依舊立 自聲流水爲誰鳴 껍질만 남은 청산 예대로 서있는데, 흐르는 물은 누굴 위해 울고 있는고.
선생은 自警詩(자경시)에 스스로를 표현하기를 "성품이 날카롭고 민첩하며 몸이 비록 장대하지는 않았으나 튼튼하고 순박하며 독학으로 한학을 배우고 구김살 없는 기질에 늘 옛날의 충신열사를 숭배하였다"라고 하였다. 1917년 선생의 손으로 처단한 친일 부호 경상북도관찰사 장승원이 죽기 전에 한 증언 "키가 5척 5촌 정도이고, 얼굴이 둥글고 검으며, 눈이 크고, 상투가 있으며, 상주사투리를 썼다"와 일치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일본군은 상주와 함창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1894년 9월에 상주, 함창, 예천의 농민군이 합세하여 상주읍내의 관아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고, 충북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이 창의하여 전국으로 퍼져간 의병전쟁은 근방의 문경에서 운강 이강년의 부대가 일어나 친일 방백 안동관찰사와 친일 순검들을 효수하는 일로 번졌다. 이러한 세상의 돌아감에 대해 선생은 마을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하고 있었으며, 농민군과 의병들에 대해 공감하는 발언을 자주 하는 선생을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 시기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외출이 잦아졌고 일본군 병참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는 일도 많아졌다. 나이 30 전후해서 그는 가끔 여행을 했다. 선유계곡, 속리산을 다녀왔다고도 하고 또 한번은 예천, 풍기 등을 돌아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영주를 들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 다시 병참부대에 끌려가서 밤새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1906년, 그가 34살이 되던 해, 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동으로 이사를 한다. 주변 사람들과 생각이 맞지 않았고 병참부대에 의해 시달리던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사람들이 모이는 풍기에서 그는 새로운 지식도 접하며 생각도 정리를 하게 되었다. 선생은 1907년 8월의 풍기.순흥전투를 경험했고, 또 11월에는 민긍호 부대의 치열한 죽령전투도 경험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으며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들여 이장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13년에 동부리 雲田운전마을(구름밭마을)로 이사 와서도 1916년까지 이장을 맡았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 1913년에 비밀결사 혁명기관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한위의 기록을 보면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의병잔당과 모험용사를 불러 대사를 도모하는 의기충천한 문사"라고 되어 있다. 또 만주에서 국가의 미래에 대해 상의하려고 碧濤(벽도) 梁齋安(양재안)을 찾아간 젊은 固軒(고헌) 朴尙鎭(박상진)은 그로부터 "진짜 義士(의사)이며 英雄(영웅)인 풍기의 채기중을 만나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선생은 1918년 7월 14일에 전라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주변에서 해외로 망명하라는 권고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으나 선생은 모험용사대의 용의주도함을 굳게 믿어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며, 국내에 일을 두고 떠날 생각은 더우기 없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1919년 2월 28일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22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0년 3월 1일에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음력 7월 8일에 선생은 동지 강순필, 임세규 등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끝으로, 이 시기 선생이 지은 시 두 편만 부분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移拘公州以生字押韻 (공주로 이감되어 생(生)자 운으로 시를 짓다)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백년도 못되는 인생 죽음과 삶이 있는데 누가 죽음답게 죽었으며 누가 삶답게 살았는고.
生欲不生生環死 死當死死死環生 살고자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죽음이 되며,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죽음은 죽음이 오히려 삶이로다.
追謝雲田諸益義捐 (의연금을 내주신 구름밭마을의 여러 벗에게 감사드리다)
惠及縲中難報地 諠爲天下不忘人 은혜가 옥중에 미쳤지마는 보답할 길이 없는 처지이니, 마땅히 천하에서 잊지 못할 사람들이요.
如何移得同人信 化以歸來內外人 어떻게 하면 동지들의 소식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서 죽어서 돌아올텐데,
선생이 살던 풍기읍 동부리 251번지에서는 1960년대 초에 탄환 수천 발이 들은 장독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그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이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선생
채기중은 1873년 음력 10월 7일에 경상북도 함창 소암1리에서 부친 채獻洛(채헌락)과 모친 曲阜(곡부) 孔氏(공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空殻靑山依舊立 自聲流水爲誰鳴 껍질만 남은 청산 예대로 서있는데, 흐르는 물은 누굴 위해 울고 있는고.
선생은 自警詩(자경시)에 스스로를 표현하기를 "성품이 날카롭고 민첩하며 몸이 비록 장대하지는 않았으나 튼튼하고 순박하며 독학으로 한학을 배우고 구김살 없는 기질에 늘 옛날의 충신열사를 숭배하였다"라고 하였다. 1917년 선생의 손으로 처단한 친일 부호 경상북도관찰사 장승원이 죽기 전에 한 증언 "키가 5척 5촌 정도이고, 얼굴이 둥글고 검으며, 눈이 크고, 상투가 있으며, 상주사투리를 썼다"와 일치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일본군은 상주와 함창에 병참기지를 설치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1894년 9월에 상주, 함창, 예천의 농민군이 합세하여 상주읍내의 관아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고, 충북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이 창의하여 전국으로 퍼져간 의병전쟁은 근방의 문경에서 운강 이강년의 부대가 일어나 친일 방백 안동관찰사와 친일 순검들을 효수하는 일로 번졌다. 이러한 세상의 돌아감에 대해 선생은 마을 누구보다도 먼저 파악하고 있었으며, 농민군과 의병들에 대해 공감하는 발언을 자주 하는 선생을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 시기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외출이 잦아졌고 일본군 병참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는 일도 많아졌다. 나이 30 전후해서 그는 가끔 여행을 했다. 선유계곡, 속리산을 다녀왔다고도 하고 또 한번은 예천, 풍기 등을 돌아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영주를 들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 날 다시 병참부대에 끌려가서 밤새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1906년, 그가 34살이 되던 해, 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동으로 이사를 한다. 주변 사람들과 생각이 맞지 않았고 병참부대에 의해 시달리던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사람들이 모이는 풍기에서 그는 새로운 지식도 접하며 생각도 정리를 하게 되었다. 선생은 1907년 8월의 풍기.순흥전투를 경험했고, 또 11월에는 민긍호 부대의 치열한 죽령전투도 경험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으며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들여 이장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13년에 동부리 雲田운전마을(구름밭마을)로 이사 와서도 1916년까지 이장을 맡았다.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 1913년에 비밀결사 혁명기관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한위의 기록을 보면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의병잔당과 모험용사를 불러 대사를 도모하는 의기충천한 문사"라고 되어 있다. 또 만주에서 국가의 미래에 대해 상의하려고 碧濤(벽도) 梁齋安(양재안)을 찾아간 젊은 固軒(고헌) 朴尙鎭(박상진)은 그로부터 "진짜 義士(의사)이며 英雄(영웅)인 풍기의 채기중을 만나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선생은 1918년 7월 14일에 전라도 목포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주변에서 해외로 망명하라는 권고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으나 선생은 모험용사대의 용의주도함을 굳게 믿어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며, 국내에 일을 두고 떠날 생각은 더우기 없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1919년 2월 28일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22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판결을 받았다. 1920년 3월 1일에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음력 7월 8일에 선생은 동지 강순필, 임세규 등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끝으로, 이 시기 선생이 지은 시 두 편만 부분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移拘公州以生字押韻 (공주로 이감되어 생(生)자 운으로 시를 짓다)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백년도 못되는 인생 죽음과 삶이 있는데 누가 죽음답게 죽었으며 누가 삶답게 살았는고.
生欲不生生環死 死當死死死環生 살고자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죽음이 되며,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는 죽음은 죽음이 오히려 삶이로다.
追謝雲田諸益義捐 (의연금을 내주신 구름밭마을의 여러 벗에게 감사드리다)
惠及縲中難報地 諠爲天下不忘人 은혜가 옥중에 미쳤지마는 보답할 길이 없는 처지이니, 마땅히 천하에서 잊지 못할 사람들이요.
如何移得同人信 化以歸來內外人 어떻게 하면 동지들의 소식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서 죽어서 돌아올텐데,
선생이 살던 풍기읍 동부리 251번지에서는 1960년대 초에 탄환 수천 발이 들은 장독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그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이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선생
채기중은 1873년 음력 10월 7일에 경상북도 함창 소암1리에서 부친 채獻洛(채헌락)과 모친 曲阜(곡부) 孔氏(공씨)의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연표)
1912: ◆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에 운동자금 전달(채기중, 김한종)
1913: ◆ 만주에서 무기 반입(한훈, 채기중) ◆ 대한광복단 설립(채기중, 김원식, 정성산) ◆ 제천 근북면사무소 습격(강순필)
1914: ◆ 충남 직산 금광 잠입, 군자금 모집 시도(김대지) ◆ 영주 대동상회 개설(박제선, 권영목)
1915: ◆ 광복회로 군대식 개편(채기중, 박상진, 한훈) ◆ 경주 광명리에서 세금마차 습격(우재룡, 권영만)
1916: ◆ 보성과 벌교의 양재학, 서도현 처단, 군자금 수급, 보성 헌병대 습격(한훈, 김상목, 유장렬) ◆ 조선 총독 데라우치 암살 시도(이관구, 성낙규, 조선환) ◆ 대구권총사건, 서우순으로부터 군자금 수합(채기중, 박상진, 김진만, 김진우) ◆ 대한광복단으로 재칭(한훈, 채기중, 김좌진, 노백린) ◆ 평북 영변에서 동양금광회사 수송마차 습격(이석대, 조맹선) ◆ 영월 상동 중석광산 잠입, 군자금 수합(채기중, 강순필) ◆ 우스리스크.니콜리스크에 기지 건설 추진(이관구)
1917: ◆ 만주 장춘에 연락기지 상원양행 설립(이관구, 채수일, 명채흡) ◆ 황해도 광제병원에 투자(이관구) ◆ 만주 길림에 조선독립기관본부 설치(우재룡, 안창일) ◆ 군자금 모금을 위해 전국 부호에게 격고문 발송(채기중, 박상진) ◆ 칠곡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임세규) ◆ 아산 도고 친일 면장 박용하 처단(김한종, 김경태)
1918: ◆ 충청에서 군자금 수합(장두환) ◆ 전라에서 군자금 수합(채기중, 이병호, 최만식)
1919: ◆ 만주에서 대량무기 구입(한훈) ◆ 광복단결사대 조직(한훈, 김좌진)
1920: ◆ 군산,김제,광주에서 군자금 모집(한훈, 박문용) ◆ 암살단 조직,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 암살 등 시도, 그러나 예비검속으로 실패(한훈, 김상옥)
1923: ◆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일천 여 일경과 열흘 넘게 대치하며 그들을 전율케 함(김상옥)
1912: ◆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에 운동자금 전달(채기중, 김한종)
1913: ◆ 만주에서 무기 반입(한훈, 채기중) ◆ 대한광복단 설립(채기중, 김원식, 정성산) ◆ 제천 근북면사무소 습격(강순필)
1914: ◆ 충남 직산 금광 잠입, 군자금 모집 시도(김대지) ◆ 영주 대동상회 개설(박제선, 권영목)
1915: ◆ 광복회로 군대식 개편(채기중, 박상진, 한훈) ◆ 경주 광명리에서 세금마차 습격(우재룡, 권영만)
1916: ◆ 보성과 벌교의 양재학, 서도현 처단, 군자금 수급, 보성 헌병대 습격(한훈, 김상목, 유장렬) ◆ 조선 총독 데라우치 암살 시도(이관구, 성낙규, 조선환) ◆ 대구권총사건, 서우순으로부터 군자금 수합(채기중, 박상진, 김진만, 김진우) ◆ 대한광복단으로 재칭(한훈, 채기중, 김좌진, 노백린) ◆ 평북 영변에서 동양금광회사 수송마차 습격(이석대, 조맹선) ◆ 영월 상동 중석광산 잠입, 군자금 수합(채기중, 강순필) ◆ 우스리스크.니콜리스크에 기지 건설 추진(이관구)
1917: ◆ 만주 장춘에 연락기지 상원양행 설립(이관구, 채수일, 명채흡) ◆ 황해도 광제병원에 투자(이관구) ◆ 만주 길림에 조선독립기관본부 설치(우재룡, 안창일) ◆ 군자금 모금을 위해 전국 부호에게 격고문 발송(채기중, 박상진) ◆ 칠곡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임세규) ◆ 아산 도고 친일 면장 박용하 처단(김한종, 김경태)
1918: ◆ 충청에서 군자금 수합(장두환) ◆ 전라에서 군자금 수합(채기중, 이병호, 최만식)
1919: ◆ 만주에서 대량무기 구입(한훈) ◆ 광복단결사대 조직(한훈, 김좌진)
1920: ◆ 군산,김제,광주에서 군자금 모집(한훈, 박문용) ◆ 암살단 조직,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 암살 등 시도, 그러나 예비검속으로 실패(한훈, 김상옥)
1923: ◆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일천 여 일경과 열흘 넘게 대치하며 그들을 전율케 함(김상옥)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376-6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을 찾았다
대한광복단 약사비, 채기중 선생 일대기 비석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입구에도 안내판이 건립되어 있었다. '1913 대한광복단 독립전쟁 발상지'
대한광복단 약사비, 채기중 선생 일대기 비석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입구에도 안내판이 건립되어 있었다. '1913 대한광복단 독립전쟁 발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