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1141-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영주시 휴천3동(조암동) 1141-4 항일투사 농고 오하근공 기념비를 찾아왔다.
항일투사 농고 오하근 기념비
공은 1897년 10월 15일, 영주군 이산면 조암리에서 태어 나셨으며, 천품이 성실하고 강직하여, 나라가 국치를 당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일제 혹정에 대한 불만과 저항심은 무언중 내심에 충만해 가고 있을 때, 1919년 3.1독립운동이 삼천리 전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감하는 그 당시 공은 23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열화와 같은 항일구국의 의분과 골수에 사모치던 국가 잃은 서러움이 일시에 폭발하여, 영주와 봉화지역까지 활동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영주장날에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광분하는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영어의 생활을 하셨으며, 출옥하신 후 공은 본고장 출신으로서 끊임없는 광복운동과 아울러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기여하였다. 공은 1963년 6월 25일 영주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시였다.
공은 1897년 10월 15일, 영주군 이산면 조암리에서 태어 나셨으며, 천품이 성실하고 강직하여, 나라가 국치를 당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일제 혹정에 대한 불만과 저항심은 무언중 내심에 충만해 가고 있을 때, 1919년 3.1독립운동이 삼천리 전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감하는 그 당시 공은 23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열화와 같은 항일구국의 의분과 골수에 사모치던 국가 잃은 서러움이 일시에 폭발하여, 영주와 봉화지역까지 활동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영주장날에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광분하는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영어의 생활을 하셨으며, 출옥하신 후 공은 본고장 출신으로서 끊임없는 광복운동과 아울러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기여하였다. 공은 1963년 6월 25일 영주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시였다.
抗日鬪士 聾故 吳夏根公 記念碑(항일투사 농고 오하근공 기념비)
抗日鬪士 聾故 吳夏根公 記念碑(항일투사 농고 오하근공 기념비)
기념비문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옷깃을 여미자. 우리 고을 천년유택에 잠드신 오하근공은 일제의 사나운 채찍아래 온 겨레가 설움받던 시절 기미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온 나라에 퍼지자 어려서부터 언향문정에 태어나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항적의 혈조를 억누를길 없어 영주의 우국청년은 ?? 봉화의 박인서동지와 거사를 내약하면서 영주 장날을 택하여 태극기를 높이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쳐 많은 시민의 호응속 산천도 함께 울려 흔들력으니 이는 구원한 민족혼의 부르짖음이요ㅕ 민족정기의 결식이였다. 그때의 공의 나이 스물 셋 그 젊음과 그 의기 실로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공의 거사로 말미암아 우리 고을의 빛이될뿐만 아니라 조국광복의 대의를 드높임에 있어서 민족의 자랑인 만세사건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르셨고 1963년 4월 24일 생애를 마치셨다. 부인은 안동권씨시고 3남 2녀를 두어 가문이 번성함은 공의 음덕이 근원깊고 흐름 긴 것을 미루워 알만하다. 이제 육갑을 맞이한 그 유족이 지방유림의 협찬을 얻어 정성을 모아 여기 비갈을 세워 공의 기절을 길이 후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옷깃을 여미자. 우리 고을 천년유택에 잠드신 오하근공은 일제의 사나운 채찍아래 온 겨레가 설움받던 시절 기미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온 나라에 퍼지자 어려서부터 언향문정에 태어나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항적의 혈조를 억누를길 없어 영주의 우국청년은 ?? 봉화의 박인서동지와 거사를 내약하면서 영주 장날을 택하여 태극기를 높이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쳐 많은 시민의 호응속 산천도 함께 울려 흔들력으니 이는 구원한 민족혼의 부르짖음이요ㅕ 민족정기의 결식이였다. 그때의 공의 나이 스물 셋 그 젊음과 그 의기 실로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공의 거사로 말미암아 우리 고을의 빛이될뿐만 아니라 조국광복의 대의를 드높임에 있어서 민족의 자랑인 만세사건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르셨고 1963년 4월 24일 생애를 마치셨다. 부인은 안동권씨시고 3남 2녀를 두어 가문이 번성함은 공의 음덕이 근원깊고 흐름 긴 것을 미루워 알만하다. 이제 육갑을 맞이한 그 유족이 지방유림의 협찬을 얻어 정성을 모아 여기 비갈을 세워 공의 기절을 길이 후세에
전하여 숭앙토록 한다.
1979년 기미60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송지영 기
진산 강우창 서
1979년 기미60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송지영 기
진산 강우창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