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근 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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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1141-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抗日鬪士 聾故 高敞 吳公 夏根 之墓(항일투사 농고 고창 오공 하근 지묘)
국가흥망에 필부유책이라는 옛말이 있다. 나라가 외환을 당하였을때 포의의 몸으로 용감하게 일어나서 항쟁의 대열에 앞장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고을의 농고 오하근공은 바로 그러한 책무를 다한 분이시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고산경앙의 감모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상조의 휘는 학린이며 관은 려조의 한림태학사이다. 누전하야 13세손에 휘 운은 호를 죽용라 하고 조남명과 이퇴계의 문인으로 관은 선조조에 진문하여 부윤에 이르렀으며 남계사와 한천서원에 제향하였다. 생의 휘는 여발이며 호를 결암 또는 남악이라 하고 정한강과 유서애의 문인으로 관은 진문하고
교리를 거처서 6개 고을에 출재하였으며 치적이 많았으니 후에 남계사에 제향하였다. 고조의 휘는 석린이고 증조의 휘는 사필이며 조의 휘는 관호인데 호는 천서라 하고 관은 노직으로 통정이다. 고의 휘는 응철이며 호는 윤강인데 사람은 문망으로 추중하였다. 비는 공주 반남박씨로 평도공 휘 은의 후인 정수의 녀다. 공은 1897년 10월 15일에 영주군 이산면 초계리 제에서 출생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기국이 비범하여 향리에서 칭예가 높았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뜻을 펴지 못하고 비분강개하다가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소리가 전국에 메아리칠 때 봉화는 동지 박인서가 영도하고 영주 지구는 3월 20일 장날을 택하여 궐기하던 애국 시민들의 독립만세운동을 솔선 지휘하던 공은 흑치 일경에 체포되고 수모자로 경성에 압송 고등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셨다. 공의 용영하고 과감한 의지와 불굴하고 불요한 기백은 만중에 사자효하면서 시종일관 하였고 광복 후에는 후진을 계도하면서 완연히 불변불당하시다가 1963년 4월 24일에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시니 초계 후속 인좌원에 예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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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으로 이장되기 전의 구 묘비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