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소룡리 93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상북도 독립기념관 자료실에 의하면 애국지사 김재명(金載明)의 생가는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 158로 되어있다.
하지만 해당 번지는 없다. 이곳은 미석2리
이곳은 김재명(金載明) 선생의 생가인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와 바로 붙어 있는 영주시 장수면 소룡리 933 미울마을 입구.
의사 김재명(金載明) 기념비를 찾았다.
하지만 해당 번지는 없다. 이곳은 미석2리
이곳은 김재명(金載明) 선생의 생가인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와 바로 붙어 있는 영주시 장수면 소룡리 933 미울마을 입구.
의사 김재명(金載明) 기념비를 찾았다.
경상북도 독립기념관 자료에는 생가가 예천 미석리로 되어있는데, 이 비문에 의하면 이곳 영주 장수에서 출생하셨다고 되어있다.
義士 金公 載明 紀念碑(의사 김공 재명 기념비)
義士 金公 載明 紀念碑(의사 김공 재명 기념비)
국가가 위급에 처했을 때 신명을 바쳐 구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남의 어려움을 보고 죽음을 무릅쓰고 돕는 것을 의라고 한다. 충을 다하는 곳에 의가 따르고 의를 지키는 곳에 충을 다하게 마련이다. 자고로 충의의 길은 값진 것이지만 알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충의를 지키는 사람은 천추만대에 드높은 이름을 남기고 백세의 추앙을 받아 인류의 사표로 존경을 받아왔다. 지난 1910년 간악한 왜적의 흉검 아래 국권은 약탈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나 이를 구제하려는 충의의 용사는 적었고 대대로 녹을 먹는 대신들도 구명도생을 위해 나라를 버렸으며 일신의 영달을 위해 간적과 야합하여 매국마져 서슴치 않는 무리도 있었다. 이러한 위난속에서도 오직 충의의 길에 몸을 던져 조국의 광복을 도모하였
던 분이 있었으니 바로 이 고장이 낳은 위대한 독립투사 김재명 선생이시다. 선생의 자는 회부요 명문가 의성 김씨의 후예이시다. 서기 1885년 7월 13일 장수면 소룡2리에서 출생하시어 어려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통하여 충효의 도를 배웠고 개화기의 격랑 속에 국가가 존몰의 위기에 처하자 약관의 나이로 구국전선에 몸을 던졌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매형 권경유를 비롯하여 의병장 윤국범과 김영진 최성천 김상태 한명만 등 제씨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 척왜전투에 몸을 언졌다. 비록 수적으로 열세요 보잘것 없는 병기를 가지고도 의사의 탁월한 지도력과 남다른 기지로 도처에서 적을 처부수어 침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전과가 전해질때마다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사기는 진작되었고 믿고 따르는 자 날로 늘어만 갔다. 지금도 안동의 북부지방인 학가산을 비롯하여 봉정사 영봉사 부근과 향당부로들의 구비와 함께 당시 의병들의 전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과부적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려 부로의 몸이 되어 한 많은 15년의 옥고 속에서 갖은 고초를 감수해야 했다. 1945년 광복의 기쁨과 더불어 망국의 한을 씻고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였다. 1977년 11월 28일 향년 92세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니 인근 사람들은 의사의 서거를 못내 애통해 하였다. 그 뒤 1990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일에 의사의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일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의사는 비록 가시었으나 남기신 불굴의 충의는 깊이 이 고장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영원한 지표가 될 것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아니하나 의사의 서훈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관민
이 합심하여 이곳에 기념비를 세워 그 공적을 추모한다. 모쪼록 이것을 계기로 삼아 이 땅에 충효의 꽃이 의사의 뒤를 이어 계속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글을 삼가쓴다.
안동 권오호 근찬 족후손 태균 근서
서기 1993년 4월 일
안동 권오호 근찬 족후손 태균 근서
서기 1993년 4월 일
경상북도 독립기념관 자료실에 의하면 애국지사 김재명(金載明)의 생가는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 158로 되어있다.
하지만 해당 번지는 없다. 이곳은 미석2리
하지만 해당 번지는 없다. 이곳은 미석2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