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집(조지훈 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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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244
탐방로그
청록파시인이자 국학자인 조지훈(본명 조동탁)은 김성규의 장녀인 김위남과 결혼하여 신혼초에 자주 이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렵에 이 마을을 배경으로 남긴 시가 바로 '별리'이다.

별리 조지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성규 선생이 살던 집이다.
김성규 가옥(조지훈 처가)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 양선 김성규(1904~1946)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복원 헤 놓은 것이다. 김성규는 무섬마을의 문운고택에서 김휘걸의 차남으로 태어나 장남인 김호규와는 각별한 우애를 나누며 같은 울타리 안에 집 두채를 지어 함께 살았는데, 큰 홍수로 인해 김성규 가옥이 유실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이 가옥마저 잦은 수해와 퐁화를 겪으면서 폐옥이 되어 빈 터로 남아있던 중, 1999년 무섬마을이 경북북부 유교문화사업 대상지역으로 지정되어 김성규 옛 가옥이 다시 복원되었다. 김성규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동중학교 본관에서 신학문을 배운 선비로서 일제 강점기에 김화진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무섬마을에 아도서숙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에 힘쓰는 한편 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 총무간사와 영주 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맡아 지역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8월 일경에 체포되어 금고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청록파시인이자 국학자인 조지훈(본명 조동탁)은 김성규의 장녀인 김위남과 결혼하여 신혼초에 자주 이 집에 머물렀으며 그 무렵에 이 마을을 배경으로 남긴 시가 바로 '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