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고현동 24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기적비의 한글 해석을 세워두었다.
보훈처 공훈록에는 박린서(朴麟緖)가 아닌 박인서(朴仁緖)로 되어있다. 인서(仁緖) 선생의 字이다.
보훈처 공훈록에는 박린서(朴麟緖)가 아닌 박인서(朴仁緖)로 되어있다. 인서(仁緖) 선생의 字이다.
애국지사 반남박공 송호 휘 린서 기적비 역
아아! 훌륭하다. 여기 고현리 산 8번지에 묘좌로 우뚝 솟은 봉분이 있으니. 이는 애국지사 박공이 묻힌 곳이다. 그의 위민행적을 반드시 후세에 전할 것이 있어서 어진 후손들이 괴정의 우측에 기적비를 세우고자, 자료 수편을 가지고와 명문작성의 책임을 내게 청한다. 돌이켜보니 만생의 무능으로 주제넘은 일이지만 동아일보 기사 및 대구복심범원 판결문과 영주시사를 보면 믿을수 있는 증거가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기술하면 어긋나거나 거짓은 아닐 것이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공의 휘는 린서이고 자는 인서, 송호는 그의 호이고 반남박씨이다. ...중략... 공은 1909년 7월 26일에 세거하던 화동자택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송로공 문하에 유학하여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논의정직하여 점차 충효의절의 의지를 터득하니 사람들이 날로 우러러 보았다. 또 영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많은 장허의 업적으로 졸업하니, 그때가 곧 백척간두에 처한 심정으로 온 천하 살람이 한결같이 배일광복의 소망을 가슴에 지니고 있던 때였다. 풍진교중에 세태가 변하고 풍속이 달라지면서 일제는 끝없는 욕심으로 민주정신을 말살하고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포박 구타 구금등으로 파가유린에 이르게 하였니 이는 우리 민족의 존망이 걸린때였다. 이에 공께서는 분개하여 반일의지로 신간농민양회에 가입하였고, 영주군 청년동맹간부로 공을 세워 큰 명예를 드높이셨다. 간혹 왜인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종일이념의 청년단이 있었으모로 공께서 1929년 5월 27일 김태두외 여러분을 데리고 순흥청년단 총무 차공을 찾아가서 해단을 경고하고, 그 뒤에 사람을 보내어 다방면으로 동향을 살려보았으나 전향의지를 찾아볼수 없었다. 8월하순에 수차례 힐책하는 와중에 언쟁이 있지 않을수없었다. 이로 인해 대구형무소 감옥에 수감되어 만고천신을 당하니 모두 감내하지 못할거야 여겼으나, 공께서는 운명을 순리에 맡기시고, 그 험난함을 순탄한것처럼 여기며 10여개월만에 출옥했다. 한편 흉년이 거듭되어 군남의 오운지곡 사람들이 거의 굶어죽게되었을때 공께서는 달려가 급난함을 규휼하고 위로하며, "나의 성의이다"라고 말씀하였으니, 공의 큰 뜻을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알수 있다. 김용석 박흥양 박승대옹 등 먼저가신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송께서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문과 한글을 이치
아아! 훌륭하다. 여기 고현리 산 8번지에 묘좌로 우뚝 솟은 봉분이 있으니. 이는 애국지사 박공이 묻힌 곳이다. 그의 위민행적을 반드시 후세에 전할 것이 있어서 어진 후손들이 괴정의 우측에 기적비를 세우고자, 자료 수편을 가지고와 명문작성의 책임을 내게 청한다. 돌이켜보니 만생의 무능으로 주제넘은 일이지만 동아일보 기사 및 대구복심범원 판결문과 영주시사를 보면 믿을수 있는 증거가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기술하면 어긋나거나 거짓은 아닐 것이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공의 휘는 린서이고 자는 인서, 송호는 그의 호이고 반남박씨이다. ...중략... 공은 1909년 7월 26일에 세거하던 화동자택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송로공 문하에 유학하여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논의정직하여 점차 충효의절의 의지를 터득하니 사람들이 날로 우러러 보았다. 또 영주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많은 장허의 업적으로 졸업하니, 그때가 곧 백척간두에 처한 심정으로 온 천하 살람이 한결같이 배일광복의 소망을 가슴에 지니고 있던 때였다. 풍진교중에 세태가 변하고 풍속이 달라지면서 일제는 끝없는 욕심으로 민주정신을 말살하고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포박 구타 구금등으로 파가유린에 이르게 하였니 이는 우리 민족의 존망이 걸린때였다. 이에 공께서는 분개하여 반일의지로 신간농민양회에 가입하였고, 영주군 청년동맹간부로 공을 세워 큰 명예를 드높이셨다. 간혹 왜인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종일이념의 청년단이 있었으모로 공께서 1929년 5월 27일 김태두외 여러분을 데리고 순흥청년단 총무 차공을 찾아가서 해단을 경고하고, 그 뒤에 사람을 보내어 다방면으로 동향을 살려보았으나 전향의지를 찾아볼수 없었다. 8월하순에 수차례 힐책하는 와중에 언쟁이 있지 않을수없었다. 이로 인해 대구형무소 감옥에 수감되어 만고천신을 당하니 모두 감내하지 못할거야 여겼으나, 공께서는 운명을 순리에 맡기시고, 그 험난함을 순탄한것처럼 여기며 10여개월만에 출옥했다. 한편 흉년이 거듭되어 군남의 오운지곡 사람들이 거의 굶어죽게되었을때 공께서는 달려가 급난함을 규휼하고 위로하며, "나의 성의이다"라고 말씀하였으니, 공의 큰 뜻을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알수 있다. 김용석 박흥양 박승대옹 등 먼저가신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송께서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문과 한글을 이치
를 가르쳤으며, 민족의 벽을 깊이 체득하게 하였다. 배우길원해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위로는 자주독립을 이루고, 아래로는 민족정기를 잃지말라고 하교하셨다. 또 지성하면 패망하는것이 천이이고 상도이니, 인륜을 배반하고 침략을 좋아하는 나라가, 어찌 세상에 존속하겠는가? 반드시 그들의 패망을 볼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간혹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모이면, 반드시 길 모퉁이에 보초를 세워 일본경찰의 순찰조짐을 미리 살피게 하시고, 강설이 깊어지면 밤새 이어졌다. 여러 단체가 운영자금을 자체적으로 마련하기 어려워 활동이 힘들어지자 토지 함여정을 팔아 조달하시니 천석유산이 하루아침에 기울었다. 왜놈의 학정은 갈수록 더욱 격해져 창씨개명령이 내려지자, 송께서는 이름 참아야 하는가? 복이 죽는일외에 어찌 다른 대책이 있겠는가? 크게 탄식하시고 이어 듣지 못하시는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우분이 병이 되어 영면하시니 때는 1940년 10월 11일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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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고현동 248에서 애국지사 박린서 기적비를 만났다.
槐亭(괴정)
애국지사 반남박공 송호 휘 린서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