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순절기념비(청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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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산2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창의순절기념비(倡義殉節記念碑)

관리번호 : 31-1-38
관리자 : 벽산김도현선생숭모회
국가보훈처 지정(2003.2.10.) 현충시설

이 비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말 의병항쟁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려는 다짐을 담아 1988년 광복절에 세웠다.
한말 의병항쟁은 전국에서 1894년부터 1909년까지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벽산 선생이 앞장서서 펼친 투쟁은 1896년 영양의병·예안의병·강릉의병 그리고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자 다시 일어나 이듬해까지 활약한 영양의병이었다.
함께 나선 인물로는 안동의병 류시연, 상주 태봉전투를 치러낸 예안의병 이만도·이중린·이인화, 삼척전투를 함께 벌인 강릉의병 민용호, 그리고 벽산의 친동생 김동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사실은 영양의병 중 특기 청기 입암 사람들의 희생이다. 벽산 선생을 따르던 이 지역 인물들의 피와 땀에다가 사부령전투로 대표되는 희생과 공적은 결코 낮추어 말할 수는 없다. 창의와 순절을 기념비라는 이름을 담은 것은 물론, 확인된 독립운동가 86인의 이름을 새긴 좌비를 곁어 함께 세운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다. 다만 자료가 부족하여 희생자와 유공자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글은 국민대학교 조동걸 교수가 짓고, 글씨는 오증호가 썼으며, 벽산김도현숭모회가 세웠다.
倡義殉節記念碑(창의순절기념비)
이곳 소청리를 비롯한 검각산 언저리의 마을들은 예로부터 은사 수선의 고장으로 구한말에는 춘추대의의 기치를 올려 그 이름이 청사에 빛나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벽산 김도현 선생을 중심으로 이웃마을이 힘을 모아 검각산성을 완축하며 의세를 결집하였고 이듬해 병신에는 청량산으로 진을 옮겨 안동의진과 연합하여 상주 태봉에 주둔한 일본 침략
군을 무찔렀다. 뒤이어 평해 울진 삼척에 만연한 왜세를 평정하고 강릉으로 나아가 대관령을 오내리며 침략군과 싸웠다. 그 우국혈성의 자취가 태백산맥의 어느마을 어느고을엔들 만아있지 않으리요. 그해 여름에는 영양으로 돌아와 조정의 해병선유에도 굴하지 않음으로써 을미의병사에서 유일하게 그해 가을까지 저항전한 소청의진의 명성을 천세에 남겼다. 그동안 사부고개전투 등 곳곳의 혈전에서 수많은 의사가 희생되고 왜병의 분탕으로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으니 이것은 나라의 운명을 예고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고군으로서 일선양맥의 확산은 커녕 일진의 지탱조차 힘겨워 그해 중양절에 진용을 해산하였다. 그리고는 초적토벌을 차명하여 대오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재기의 칼을 달았다. 1905년 을사에 5조약이 늑결되자 구국의 의병을 다시 일으켜 승패에 아랑곳없이 오로지 나라와 의를 위하여 싸웠다. 그러다가 의사들은 영어의 몸이 되거나 순절하였고 마을은 또다시 불타버렸다. 그리고 벽산 선생은 경술국치 후인 1914년에 장렬한 절명시를 남기고 도해 자정하였다. 역사는 그 불탄 잿더미에서 참된 힘을 찾
고 순국한 영령들의 유열을 이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 형제와 집과 나라를 잃고 방랑하던 일제하의 슬픈 사연과 마을의 황락한 참경과 그리고 민족통사를 영광스런 광채로 반조하는 비를 세우니 선열의 뜻을 기리는 단심과 슬기를 모아 마을과 겨레를 지키시라.
1988년 8월 15일 국민대학교 교수 조동걸 근찬 오증호 근서
뒤쪽의 창의순절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