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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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방전리 478-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殉國 鶴南 金大圭 義士 紀念碑(순국 학남 김대규 의사 기념비)
殉國 鶴南 金大圭 義士 紀念碑(순국 학남 김대규 의사 기념비)
공의 휘는 대규이고, 자는 순집이며, 호는 학남으로 관은 안동이다. 고려 태사 휘 선평의 후손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고제이며 예안 마곡서원에서 봉향된 눌재 휘 생명의 12대손으로 고의 휘는 병도이고 비는 진성이씨이다. 공은 1878년 고종 무인 11월 초 9일에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교동에서 출생하시니 기골이 건장하고 천품이 출중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공의 출생지인 교동은 한말에 문과급제하여 홍문관 시강관 등을 역임한 가은 박상범의 유산정사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어릴 때 남송의 충신인 문천상의 정기가를 애송하였으며 소년기에는 한학 수업에 전심하고 특히 손오자병서에 정통하였다. 이웃마을 흥구동에 우거한 거유이며 항일지사
인 방산 허훈은 일찍 공에게 위국간성지재가 될 것이니 자중자애하라고 이른 바 있다. 1905년 왜제는 을사보호조약이란 미명으로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니 보국 민영환, 향산 이만도 양선열들이 연이어 비분 자결하는 와중에서 공은 최후까지 항전보국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11월 하순에 의병활동에 있어 천혜의 요쇄인 청송 주왕산에서 내산 이현규 의사와 함께 구국 격문으로 모병하니 500여명의 애국 장정들이 운집하여 우리의 의병부대가 편성되었다. 1906년 병오 2월에 위 부대의 도포장에 피선되고 청송, 영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선전하였다. 특히 같은 해 4월 상순 진보 오누지전투에서 일본군 헌병 오장인 무등부대와 접전하여 무등이하 적 사살 10여명의 대첩을 거두었다. 격전에서 불행히 공은 전상을 입게 되었으나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같은 해 5월 울진 죽변과 왜관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영양군 입안면 교동에서 잔류병력을 재규합할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의병을 재훈련 중 일본군부대에 포위되었으나 뛰어난 용병술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추격하는 일본군에 고전하였다. 1907년 정미 11월 21일 태백산맥의 고산준령인 안동군 임동면 대곡동 장갈령전투에서 수일간의 교전 끝에 우세한 적 병력의 집중화공에 장렬히 순국하니 향년 30이었다. 국가는 공의 혁혁한 공훈을 기리어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간산 정만현의 문집 중에 학남 김대규 의사전과 한국독립운동사에 각 등재된 관계문헌 사료를 보고 공의 위국충절에 감복하여 위와 같이 기공을 약술하고 이에 명하노니
태백산 정기받은 절세의 항일투사 내 한몸 초개같이 나라에 바쳤다오. 청사에 빛난 공적 오늘의 우리 광영
지나가는 길손이여 잠시만 살피소서
단기 4325년 임신 5월 18일 전 대한민국 광복회장 이강훈 근찬
전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근서
경상북도 영양군 유림회 근수
협찬 대한민국 광복회장 김승곤 대구지방 보훈청장 신동하 순국선열 유족회장 이종갑
영양읍으로 가는길에 영양군 입암면 방전리 478-5 에서 만난 순국 학남 김대규 의사 기념비
순국 학남 김대규 의사 기념비
김대규(金大圭) 의사는 1878년 11월 9일 경북 영양군 입암면 교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판관공(判官公) 휘 계권(孫權)의 15대손이며 눌재공(訥齋公) 휘 생명(生溟)의 12대손으로서 호는 학남(鶴南)이다.
의사는 기골이 장대하고 지조가 강직했으며 일찍이 유학(儒學)에 전념하다가 국운이 기울어가던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청송군과 영양군에서 의병을 모아 도포장(都鉋將)으로서 주왕산과 청량산을 무대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이듬해 4월에 청송군 진보면 오누지(못)전투에서 왜적 무등(武騰)부대와 맞서 파천면 어천리까지 추격하여 수백 명의 적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병력을 수습하고 군사를 증강하여 5월에는 을진군 죽변면과 칠곡군 왜관읍 등지에서 왜군과 싸웠고 10월에는 이곳 영양군 입암면 병옥동에서 적군을 맞아 접전을 하다가 적의 강력한 세력으로 포위를 당하자 한밤에 차가운 강물 속으로 병력을 투입 15리나 거슬러 올라가 연당동, 대천동으로 이동 집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7년 태백산과 일월산 일원의 준령에서 적과 맞서 악전고투하다가 이해 10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대곡동 장갈령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한을 품은 채 장렬히 전사하니 이때 장군은 30세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77년 12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 제476호로 추서되었다. 1993년 6월 16일 영양군 유림회에서 장군의 공적을 기려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