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 집(추모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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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4
탐방로그
영양군에서는 복원한 남자현 지사의 집 터이다. 1999년 11월 30일 대지 4,919㎡에 본채 및 부속사를 복원하였다. 남자현 지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다. 부군(夫君)이시던 김영주(金永周) 의병이 전사하시고 이후 유복자인 아들 김성삼과 만주로 이민하여 평생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길림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47명의 독립지사를 석방시킨 사건으로 명성이 알려졌으며 1931년 만주사변 때에는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자기의 혈서로 쓴 조선독립원(韓國獨立願)을 전달한 사건이 널리 알려져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 1999년 3월 1일
전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문학박사 박영석 짓고 풍산 류한상 쓰고
영양군수와 남자현 지사 생가지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가 뜻모아 세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4 남자현 선생 생가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남자현 지사 항일순국비와 추모각이 있다.
남자현 지사 생가지(南慈賢 志士 生家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南慈賢) 지사는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1873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한공(珽漢公)의 셋째 따님으로 태어나 부모님 슬하에 한학을 공부하며 성장, 1891년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김영주(金永周)와 결혼, 부군(夫君)이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1896년 청송진보지역전투(靑松眞寶地域戰鬪)에서 전사하자 민족계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복자인 김성삼을 데리고 만주로 들어가 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만주에서 재만조선여자교육회(在滿朝鮮女子敎育會)를 설립하여 여성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1927년에는 길림의 안창호(安昌浩) 연설장에서 47명의 독립지사가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그때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전원 석방되도록 함으로써 지사의 명성은 중국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국제연맹조사단이 만주에 오자 자기의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血書)를 전달하기도 하였고,
1933년 3월 1일 일제가 중국동북지역을 강점하고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운 1주년 기념행사날 일제의 무등신의(武藤信義) 만주국 전권대사를 암살하려다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아 사경이 되어 출옥하였으나 8월 22일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순국(당시 61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지사의 독립정신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영양군에서는 지사(志士)가 출생한 이 자리에 1999년 11월 30일 대지 4,919㎡에 본채 및 부속사를 복원하였다.
追慕閣(추모각)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4 남자현 선생 생가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남자현 지사 항일순국비와 추모각이 있다.
南慈賢 志士 抗日殉國碑(남자현 지사 항일순국비)
남자현 지사는 1873년 12월 7일 경상북사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학행으로 알려진 통정대부인 남정한과 부인 진성이씨 사이의 셋째따님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천품이 현숙하고 총명하여 공부하기를 즐겼던 지사는 19세되던 1891년에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김영주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의병에 참가하였던 부군이 1896년 7월 11일 진보지역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그때 지사의 나이 24세였다. 다행하게도 일점혈육이 태어났으니 유복자인 하들 김성삼(영달)을 볼 때마다 또한 고된 생활을 영위할 때마다 나라의 원수이자 부군의 원수를 갚는 일은 더욱 절실하였다. 이에 1907년 친정아버지 남정한을 따라 의병전쟁에 투신하였으니 지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이것이 시작이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낀
지사는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참의부 등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지사는 재만주 한인사회에 교회와 여성교육회 등을 설립 조직하여 항일근거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이면서 한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여성으로서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도 하였다. 또한 지사는 1925년 4월에 서울로 잠입하여 齋藤實(재등실: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성에서 안창호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31년 김동삼이 신의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구출을 시도하였고 국제연맹 조사단의 릿톤경이 만주에 오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보고 통탄한 나머지 혈서로써 단합을 호소한 적도 있었다. 1933년 3월 1일은 일제가 중국 동북지역을 강점하고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운 1주년 기념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지사는 이때 만주 강점의 최고 원흉인 전권대사 武藤信義(무등신의:무토 노부요시)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같은 해 2월 27일 하얼빈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자사는 일본 경찰의 악독한 취조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혼자 꾸민 것이라고 주장하여 같이 체포된 두 동지가 석방되게끔 하였다. 투옥된 지사는 15일간 단식투쟁하면서 일본사람만 보면 호통을 치고 매도를 하며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첫째 가지고 있던 돈 200원을 조선이 독립되는 날 축하금으로 바치라. 둘째 손자 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 셋째 남은 돈 49원의 절반은 손자가 공부하는데 쓰고 나머지는 반은 친정의 종손자에게 주어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국제연맹조사단에게 보냈던 자신의 손가락을 아들 성삼에게 내어주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순국하였으니 때는 1933년 8월 22일 당년 61세의 나이였다. 지사의 유해는 하얼빈 남강 외국인묘지에 안치되었다. 후손들은 지사의 유언에 따라 독립축하금을 1947년 서울운동장에서 김구 선생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남자현 지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명하노니
연약한 여아로 태어났으나 그 기백은 이미 장부였고 짧았던 부부 사랑을 조국 사랑으로 극복하였네. 이역만리 만주 땅에다 항일 터전 마련하고 독립투쟁, 여성계몽 가리는 것 없었으니 그 지칠 줄 모르던 구국의 혼 민족과 함께 살아 숨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