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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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탐방로그
본래 신돌석 장군의 생가는 1850년 무렵 아버지 신석주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0년 일본 관헌들이 집을 불태웠고 1942년 상량주 연목 일부를 새로이 세워 기와집으로 꾸몄던 것을 1995년 현재의 초가로 복원한 것이라 한다. 신돌석 장군의 유적지와는 약 1.6km 떨어져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있는 신돌석 장군 생가와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찾아왔다.
신돌석 장군 생가지(申乭石 將軍 生家지)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신돌석(申乭石, 1878~1908) 장군 생가는 장군의 부친인 신석주(申錫柱)가 1850년경에 건립 하였다 한다. 신돌석은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 후 의병을 일으켜, 영덕·영양·울진 등지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신돌석은 지역 주민의 협조 속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과 수십 차례의 유격전을 벌였고, 인근 지역의 의병들과의 연대를 통해 영남 지방의 의병장 중 가장 활약이 컸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생가는 초가집이었으나, 1940년경에 일본관헌들이 독립의지를 꺽기 위하여 정략적 차원에서 불태워 버려 소실되었다. 이후 1942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하였으나, 1995년 8월 19일에 신돌석 장군 생가 정비 공사를 통해 현재의 초가집으로 복원되었다.
신돌석의 집은 아버지 신석주가 1850년 무렵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 1940년 일본 관헌들이 불태워 일부가 무너졌다. 1942년 상량주 연목 일부를 새로이 세우고 기와집으로 꾸몄으나 1995년 현재의 초가로 복원하였다.
신돌석 장군 생가 유허(申乭石 將軍 生家 遺墟)
신돌석(1878~1908) 장군은 고종 15년(1878) 외가에서 석계(錫桂)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라나 서당에서 공부할 무렵 행동이 날래고 담용이 뛰어나 항상 대장으로 추앙되곤 하였다. 그후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장군은 영해의병(寧海義兵)의 중군장이 되어 손병희(孫秉熙), 박상진(朴尙鎮), 이강년(李康年)과 함께 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6년 장군은 의병장이 되어 영덕(盈德), 영양(英陽), 울진(蔚珍) 등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우고 1908년 지품면(知品面) 눌곡리(訥谷理)에서 순국하였다. 오직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항일운동에 몸바치신 장군의 충성을 기리어 후세에 귀감을 삼고자 생가터에 이 표석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