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
- 탐방로그
- 강원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 3.1 공원을 찾았다. 이 곳에는 독립 및 호국 관련 기념물이 여럿 건립되어 있는데 그 중 3.1운동기념비를 탐방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운동기념비
횡성 3.1운동 기념비
관리번호 : 16-1-19
소재지 :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3.1공원 내)
건립자 : 동아일보사,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관리자 : 횡성군
횡성 3.1운동은 강원도 3.1운동의 효시요, 진원지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거센 만세시위가 있었다. 횡성 천도교회 이채일과 이동구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수 백명의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군민 1,300여명이 운집하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이어 2일까지 200여 명이 일본 헌병분견소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2일까지 각 면마다 거센 만세운동을 펼치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승문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에 순국하였다.
이 숭고한 횡성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아일보사와 3.1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으로 1972년 8월 15일 횡성 3.1공원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관리번호 : 16-1-19
소재지 :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3.1공원 내)
건립자 : 동아일보사,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관리자 : 횡성군
횡성 3.1운동은 강원도 3.1운동의 효시요, 진원지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거센 만세시위가 있었다. 횡성 천도교회 이채일과 이동구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수 백명의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군민 1,300여명이 운집하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이어 2일까지 200여 명이 일본 헌병분견소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2일까지 각 면마다 거센 만세운동을 펼치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승문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에 순국하였다.
이 숭고한 횡성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아일보사와 3.1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으로 1972년 8월 15일 횡성 3.1공원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3.1운동기념비
3.1운동기념비
1919년의 3.1만세는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참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국권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었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하늘이 뻐개지고 땅이 흔들릴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이러한 정당한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왜적의 탄압은 어떠하였던가.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과 형벌이었다. 이해 3월 27일 우리 횡성에서는 수천군민이 읍내장터에 모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잇따라 4월 12일까지 사이에 각면마다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승문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 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 아래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창간한 동아일보사는 유서깊은 이 곳에 이 기념비를 세워 그 거룩한 정신을 만대의 후세까지 길이 받들어 드높이려 한다. 1972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
1919년의 3.1만세는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참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국권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었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 하늘이 뻐개지고 땅이 흔들릴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이러한 정당한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왜적의 탄압은 어떠하였던가.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과 형벌이었다. 이해 3월 27일 우리 횡성에서는 수천군민이 읍내장터에 모여 장렬한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잇따라 4월 12일까지 사이에 각면마다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던 중 하영현 강달회 전한국 강승문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 의사는 옥중에서 왜적의 총칼 아래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창간한 동아일보사는 유서깊은 이 곳에 이 기념비를 세워 그 거룩한 정신을 만대의 후세까지 길이 받들어 드높이려 한다. 1972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
동아일보 창간 45주년(1965년) 기념사업으로 이 비를 세움에
어 이 고장 협찬회의 도움이 컸기에 이름을 새겨 고마움을 표한다.
어 이 고장 협찬회의 도움이 컸기에 이름을 새겨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