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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172-1
- 탐방로그
- 박주억 선생의 종택이다. 박주억 선생은 이곳 종가에서 종손으로 태어나 영양군 답곡리로 이주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건국훈장 애족장 애국지사 박주억(병량)선생 생가.
박주억 선생은 이곳 종가에서 종손으로 태어나 영양군 답곡리로 이주하였다.
박주억 선생은 이곳 종가에서 종손으로 태어나 영양군 답곡리로 이주하였다.
清悟堂(청오당)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172
이 가옥은 무안박씨 중조(진승)의 13대손이며 부사직을 지낸 영해파 입향조인 지몽(증, 사복시정)의 종택이다. 조선초기 중앙에서 사환을 지속하던 무안박씨가 영해, 영덕에 입향한 것은 지몽조에 의해서인데 1470년경 백부 평강공(휘, 이)이 영덕현감으로 부임하자 권솔의 종사관으로 공의 임지 영덕에 와서 이곳 인량리에 정착한 이래 오백여년 세거하게 되면서 자손이 번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일제강점기 30대 종손 병량(주억)(독립애국지사)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종택마져 처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택없이 지난 세월이 무릇 한 세기가 가까워짐에 온 종중이 이의 복원에 뜻을 모아 성력으로 2011년 5월 인량리에 새로이 종택을 건립하였다. 성행이 고결하시고 세와 이를 멀리하며 지내신 지몽선조의 뜻을 취하여 당명을 청오당으로 삼은 것이다.
이 가옥은 무안박씨 중조(진승)의 13대손이며 부사직을 지낸 영해파 입향조인 지몽(증, 사복시정)의 종택이다. 조선초기 중앙에서 사환을 지속하던 무안박씨가 영해, 영덕에 입향한 것은 지몽조에 의해서인데 1470년경 백부 평강공(휘, 이)이 영덕현감으로 부임하자 권솔의 종사관으로 공의 임지 영덕에 와서 이곳 인량리에 정착한 이래 오백여년 세거하게 되면서 자손이 번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일제강점기 30대 종손 병량(주억)(독립애국지사)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종택마져 처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택없이 지난 세월이 무릇 한 세기가 가까워짐에 온 종중이 이의 복원에 뜻을 모아 성력으로 2011년 5월 인량리에 새로이 종택을 건립하였다. 성행이 고결하시고 세와 이를 멀리하며 지내신 지몽선조의 뜻을 취하여 당명을 청오당으로 삼은 것이다.
表誠記(표성기)
태백산맥의 서기 어린 산자수명의 땅. 인량리에 입향조 사복시정 지암공께서 정착한 지 오백여 성상! 그러나 지난 일제 강점기에 17대 종손 병량공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종택을 헌납한 후 우리 후손들은 종택없이 한 세기를 지내오던 중 종중 후손들이 이의 복원에 뜻을 모아 모금, 2011년에 종택 청오당을 새로 건립하게 되었다. 이에 물심양면으로 공헌한 자손들의 그 갸륵한 뜻과 특지종원의 정성을 길이 표창하기 위하여 이 비석을 건립한다. 우리 선조들은 세리를 멀리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던 조상들의 유지를 받들어 더욱 숭조 돈종함으로써 누만대에 빛나는 명문거족을 이룩하는데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서기 2015년 3월 15일 후손 찬구 근찬
태백산맥의 서기 어린 산자수명의 땅. 인량리에 입향조 사복시정 지암공께서 정착한 지 오백여 성상! 그러나 지난 일제 강점기에 17대 종손 병량공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종택을 헌납한 후 우리 후손들은 종택없이 한 세기를 지내오던 중 종중 후손들이 이의 복원에 뜻을 모아 모금, 2011년에 종택 청오당을 새로 건립하게 되었다. 이에 물심양면으로 공헌한 자손들의 그 갸륵한 뜻과 특지종원의 정성을 길이 표창하기 위하여 이 비석을 건립한다. 우리 선조들은 세리를 멀리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던 조상들의 유지를 받들어 더욱 숭조 돈종함으로써 누만대에 빛나는 명문거족을 이룩하는데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서기 2015년 3월 15일 후손 찬구 근찬
문이 잠겨 있어서 내부로 들어갈 순 없었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인량마을에 있는 애국지사 사적지를 찾아가고 있다.
인량마을
이곳 인량리(仁良里)는 영해에서 서쪽으로 십리 되는 곳에 삼면이 산으로 쌓여있고 남쪽에 내가 가로 놓여있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큰 동리로 영남의 명지(名地)로 이름이 높다. 마을의 역사는 선사(先史)시대부터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옛날 지명은 잉량화(仍良火)라 하다가 뒷산 형국이 학이 나래를 펼친 것과 같다하여 비개동(飛蓋洞), 나래골, 익동(翼洞)이라 하였으며 광해(光海) 2년(1610)에 인량(仁良)으로 개칭되었다. 일설, 나라 골(國洞)이라 불려오는데 이는 나래 골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의하면 인량리는 팔성종실(八姓宗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예부터 풍속이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부내(府內)에서 으뜸가는 동리라 하였다.
광해 7년(1615)에 군내에서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제정하였으며 숙종 9년(1683)과 1927년에 규약(規約)을 시대에 맞게 중수(重修)하여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기미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의병으로 구국(求國)에 참여하신 분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현재도 많은 인재가 각계에서 활약(活躍)하고 있다.
동리에는 크고 작은 고가옥(古家屋)과 많은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으며, 특히 전통테마 마을과 정보화 마을로 선정되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로 군내에서 다른 마을보다 앞서가고 있다.
이곳 인량리(仁良里)는 영해에서 서쪽으로 십리 되는 곳에 삼면이 산으로 쌓여있고 남쪽에 내가 가로 놓여있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큰 동리로 영남의 명지(名地)로 이름이 높다. 마을의 역사는 선사(先史)시대부터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옛날 지명은 잉량화(仍良火)라 하다가 뒷산 형국이 학이 나래를 펼친 것과 같다하여 비개동(飛蓋洞), 나래골, 익동(翼洞)이라 하였으며 광해(光海) 2년(1610)에 인량(仁良)으로 개칭되었다. 일설, 나라 골(國洞)이라 불려오는데 이는 나래 골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의하면 인량리는 팔성종실(八姓宗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예부터 풍속이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부내(府內)에서 으뜸가는 동리라 하였다.
광해 7년(1615)에 군내에서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제정하였으며 숙종 9년(1683)과 1927년에 규약(規約)을 시대에 맞게 중수(重修)하여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기미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의병으로 구국(求國)에 참여하신 분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현재도 많은 인재가 각계에서 활약(活躍)하고 있다.
동리에는 크고 작은 고가옥(古家屋)과 많은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으며, 특히 전통테마 마을과 정보화 마을로 선정되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로 군내에서 다른 마을보다 앞서가고 있다.
인량마을 안내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172-1 인량마을 무안박씨 지몽종택 청오당 애국지사 박주억의 생가 표지석을 찾았다.
務安朴氏 寧海派 世居地 入鄕祖 諱 之蒙 宗宅
(무안박씨 영해파 세거지 입향조 휘 지몽 종택)
(무안박씨 영해파 세거지 입향조 휘 지몽 종택)
아, 종택 청오당이여!
무안박씨영해파종친회장 박억종
1470년경
무안박씨 영해파 입향조 어른께서
인량 뜰 명당에다 종택을 지으셨네
후손은 종택을 오백여년 지켰건만
30대 종손께서 독립운동 하시다가
종택을 처분하는 불운을 맞이했네
수천 명의 후손들은 종택없는 설움 속에
통한의 긴 세월을 모질게도 견디시어
오늘의 이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네
백년 만에 다시 지은 우뚝 솟은 청오당아!
만오천의 종인들은 얼싸안고 춤을 춘다
이제 우리 종인들은 종택에 모여앉아
오순도순정 나누고 서로 돕고 사랑하면
자손들이 복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되리
무안박씨영해파종친회장 박억종
1470년경
무안박씨 영해파 입향조 어른께서
인량 뜰 명당에다 종택을 지으셨네
후손은 종택을 오백여년 지켰건만
30대 종손께서 독립운동 하시다가
종택을 처분하는 불운을 맞이했네
수천 명의 후손들은 종택없는 설움 속에
통한의 긴 세월을 모질게도 견디시어
오늘의 이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네
백년 만에 다시 지은 우뚝 솟은 청오당아!
만오천의 종인들은 얼싸안고 춤을 춘다
이제 우리 종인들은 종택에 모여앉아
오순도순정 나누고 서로 돕고 사랑하면
자손들이 복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