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기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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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582-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방되기 이르자 항상 불만과 분개로 구국일념을 지향하시다가 1919 기미삼일운동 일어나자 공은 열혈청년 27세에 민족독립정신으로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서 2천여명이 후속으로 이수학씨 등과 사전모의하여 창수면 수리에서 독립운동을 솔선주도하여 시위에 참가한 2백여명이 군중과 함께 만세를 연호하며 경찰주재소에 진입하여 집기와 문서를 파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중에 숨겨둔 일경의 소지품을 색출 파손하는 등 격렬시위를 하여 일경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제압하지 못하고 당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영천형무소 수감징역 1년을 선고받고 만기출옥하셨다 공은 출옥 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구국웅지를 품고 동지를 모아 나라일을 걱정하셨으며 일경의 요시찰 감시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사들과 구국의 묘책을 상의하셨고 감시가 심해지자 도피생활을 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일제의 항복 종말인 8.15 광복을 맞이하셨다. 해방 후에는 혼탁한 세월에 광복의 기쁨보다는 옥살이의 고문여독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간약의 생활하시면서도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한학을 가르치시어 국가동량지재로 유학의 맥을 잇는 후진양성을 통해 구국애족의 얼을 심고 지역발전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다가 1974년 11월 22일 향년 81세로 영안하시었다 그러나 국가유공자로 등재되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기던 차에 이것을 안타갑게 여기는 지역유지 여러분의 조언과 격려에 힘입어 관계기관 요로에 독립운동당시의 신문기사 법원의 판결문 형무소 복역기록등 자료를 구비하여 수차에 걸쳐 접수하여 늦게나마 국가독립유공자로 등재되어 증서와 애국지사훈장 및 포상이 추서되어 2001년 8월 15일에 전수 받기에 이르렀으니 만시지탄 속에서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공이 바치신 일생 동안의 애국애족과 자주독립의 얼을 지역사회와 온 나라에 널리 현창할 수 있게 됩니다 일찍이 공이 남기신 애국애족의 족적은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소재 독립애국지사추모비에도 휘자가 각인된 바 있으나 공이 남기신 숭고한 독립정신의 얼을 추모하고 후세 교육의 본으로 청사에 남을 행적을 비명에 새겨 길이 전하고자 지역주민과 친지들이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이 자리에 추모비를 삼가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