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3.1의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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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산49-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의거탑 건립연혁
3.1의거탑을 찾아갈 때 국도에서 들어가다 보니 뒤쪽에서 내려왔다.
탐방 후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입구가 별도로 있었다.
3.1의거탑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산 49-1 예주문화예술회관 앞 영해3.1의거탑을 찾아왔다.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산 49-1 예주문화예술회관 앞 영해3.1의거탑을 찾아왔다.
3.1 의거탑 비문
영해는 오랜 역사를 누려온 고장이요. 강산도 아름다운 겨레의 옛 터전이다. 푸른 동해의 기상을 받은 이곳 동포들 밝고 의롭게 사는 전통을 지켜왔었다. 지난날 왜적에 항쟁했던 3.1 운동때 가장 치열하게 싸운 곳도 이곳이었다. 돌아보건데 1919년 3월 18일 음력으로는 2월 17일 장날을 가려 영해를 중심으로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 수만 군중들이 지도자의 뒤를 따라서 죽음을 무릅쓰고 외쳤던 만세 소리는 동해의 파도소리보다도 더 높았었다. 피흘리고 숨지고 매맞고 옥에 갇히고 수난 속에도 굴하지 않는 의사열사들 우리 모두 그 영혼앞에 위로를 드리고 그 뜻을 새겨 겨레의 갈길을 삼으리라.

1982년 8월 15일
영해는 오랜 역사를 누려온 고장이요 강산도 아름다운 겨레의 옛 터전이다. 푸른 동해의 기상을 받은 이곳 동포들 밝고 의롭게 사는 전통을 지켜왔었다. 지난날 왜적에 항쟁했던 3.1운동 때 가장 치열하게 싸운 곳도 이곳이었다. 돌아보건대 1919년 3월 18일 음력으로는 2월 17일 장날을 가려 영해를 중심한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 수만 군중들이 지도자의 뒤를 따라서 죽음을 무릅쓰고 외쳤던 만세소리는 동해의 파도소리 보다도 더 높았었다. 피 흘리고 숨지고 매맞고 옥에 갇히고 수난 속에도 굴하지 않은 의사 열사들 우리 모두 그 영혼앞에 위로를 드리고 그 뜻을 새겨 겨레의 갈길을 삼으리라.
1982년 8월 15일
이은상 글 김응현 씀
3.1의거탑 제유문
우러러 볼지어다 드높은 이탑을. 이탑은 영해인의 의열??결된 표상의 탑이다. 조국이 왜적의 말발굽아래 짓밟혔을때 ??해인은 의병을 일으켜 경원저항하였고 나라를 빼았을때??운동을 창도하여 독립을 부르짖으면서 순국하셨다.
자고로 영해는 천호, 유순, 예?, ?양으로 불리다가 영해로 개칭되면서 목사도호부사가 여러??을 관장하던곳으로 동해안의 웅?요 문물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역대로 충신열사와 ?학군자와 제세명현들로 화?를 이뤄 높은 고장이다. 경술년에 국치를 맞자 영해인은 일제에의 모든 ?력을 거부하면서로 왜제는 이를 보복하여 영해로 하여금 1면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장하도다 1919년 3월 18일 영해의 유림과 기독교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여러 고을의 청장년 수천명과 더불어 이곳 장날을 기해 대규모의 독립문세운동을 일으켜 피의 ??을 하였고 밤이되자 이들은 창수, 병곡, 축산, 석보로 각기들이가 국권회복을 밤새도록 외쳤으며 날이새자 다시 영해로 직결하여 독립만세를 천지가 진동토록 브르짖었으며 일제????장은 그의 졸개와 포항평해주둔 왜군 헌병들을 합세시켜 ??투사들을 진압코져 출동하였으나 되려 ?퇴당하고 물러났다. 이때 대구 주둔? ??78소속 기병이 들이닥쳐 시위자들에게 무차별 발사를 ??하여 2000여명의 순국자, 중상자, 피체자가 생겨 이러서 ??해산 당하고야 말았다. 이 탑은 그때를 전후한 순국자의 넋을 기리기위하여 건립된것이다. 진실토록 영해인의 이 의거야 말로 후일 영남일대의 3.1운동을 선도한 진원이 되었다. 광복된지 30여년이 ?? 만시지탄은 있으나 이곳 애?단체인 동심회가 위대한 이 정신을 후세 길이 남기고자 이 탑의 건립을 발기하고 3.1의거탑건립추진위원회?? 동안 가진 여러 ?을 물리치며 각계각층으로부터 협찬을 얻어 마침내 1983년 11월 19일에 제작하였도다.
3.1의거탑 봉안 선열 240위의 이름과 건립연혁을 새겨 놓았다.
3.1의거탑 봉안 선열 24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