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벌영리 781-1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융희 4년 神州(신주)가 陸沉(육침)되어 蒼生(창생)이 이류의 쇠사슬에 묶였다. 이에 열혈이 끓어오른 ○○ 16의 해강 이겸호 의사는 개연히 붓을 던지고 팔역에 동지를 찾다가 1916년 만주로 들어가 신흥무관교를 마치고 이상룡 이시영 김동삼 제 선배를 좇아 부민단 요원으로써 그 지령을 받아 1919년 초춘 귀국하여 선전공작의 임무를 띠고 안동 영양 영해 등지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3월 1일 서울에서 천지를 뒤흔든 독립만세의 함성과 시위대열을 마친 뒤 다시 만주에 밀행하여 남만의 군정부에 이어 상해의 임시정부에 들어가 익년 군자 모집의 사명으로 다시 귀국 활동 중 대구경찰에 피집하여 일곱달의 혹○ 감형에 ○○
부수어지고 살이 찢기어져도 지녔던 기밀과 숨겼던 무기는 넘기지 않았으며 향리에서 30여 사○과 태화중학을 일으켜 빛난 우리 국사의 군대식 훈련으로써 새 일꾼을 기르고 野蜂誌(야봉지)로써 민중의 항쟁 의식 고취하다가 적의 폭력에 학원은 폐쇄되고 서적은 押奪(압탈) 또 발간되었으니 다시 간직한 무기를 가지고 새로 입국한 동지들과 길을 나누어 군자를 모집하다가 일부 동지는 戰殉(전순)하고 그는 세해 여섯달의 형을 치르고 다시 장육사에서 요양 중 신한촌을 건설하다가 강릉경찰에 한해 두달의 형을 치르고 또다시 서울에서 요양 중 김창숙 여운형 제 동지와 밀회하여 2차 세계전의 시기를 노려 畫策(화책)한 다 있었더니 기선을 ○ 적의 예비 검속에 또 한해 적의 萬端(만단) ○○를 물리치고 드디어 병이 중하매 가석방 명분으로 흥국사에서 요양시킨다면서 賊警(적경)의 순사 감시 하 친족도 접근 못하고 화침 외 사리는 농혈로 고추물과 독형의 끝은 浮症(부증)과 ○○로 신음하기 또 한해 1942년 7월 16일 48세를 일기로 조국 광복을 못 본채 떠났고 사후에도 외인이 엄금되어 한양의 一坏荒阡(일배황천)을 아직 못 찾았다. 아! 그는 실로 목숨과 피와 넋을 조국에 다 바쳤으며 그의 일생은 싸우고 꺾여서 또 싸워 굽힐 줄 모른 그 정신으로 끝내었다. 국토의 완전 통일 자주를 앞둔 이날 고인의 그 정신을 만대 자손에 전하려고 기념사업회에서 편석을 세우매 불녕이 감히 蕉拙(초졸)로써 辞避(사피) 못하여 그의 싸운 자취를 약서하고 이에 현시를 바치노니
님이여! 님의 찾으시려던 금수강산 이제야 도로혔네! 님은 어더리에? 한물 위 어늬
님이여! 님의 찾으시려던 금수강산 이제야 도로혔네! 님은 어더리에? 한물 위 어늬
뫼 님의 몸 간직한지? 님의 몸 묻혔은들 님의 넋 사라지리! 님의 넋 어드리? 아득한 滄海(창해)에 붉게 솟는 해로 되야 님의 사랑하신 무궁화동산 골고루 비춰내야 길이길이 빛내련가!
1965년 3월 일 해강 의사 기념사업회 립
풍산 유석우 찬
족질 병조 서
1965년 3월 일 해강 의사 기념사업회 립
풍산 유석우 찬
족질 병조 서
영덕군 영해면 벌영리 781-10.
해강 이겸호 의사 기념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33-1-14
관리자 : 영덕군
소재지 :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이 기념비는 영덕이 낳은 독립운동가 해강 이겸호 선생의 숭고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독립운동정신을 기림으로써 그분의 명예를 선양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1965년 3월 건립한 현충시설물로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강 이겸호 선생(1895~1942)은 대한통의부 대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후 1920년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띄고 입국하여 1923년 대한통의부 제1소대 이덕순, 신형섭 등과 함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33-1-14
관리자 : 영덕군
소재지 :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이 기념비는 영덕이 낳은 독립운동가 해강 이겸호 선생의 숭고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독립운동정신을 기림으로써 그분의 명예를 선양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1965년 3월 건립한 현충시설물로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강 이겸호 선생(1895~1942)은 대한통의부 대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후 1920년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띄고 입국하여 1923년 대한통의부 제1소대 이덕순, 신형섭 등과 함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海岡 李謙浩 義士 紀念碑(해강 이겸호 의사 기념비)
海岡 李謙浩 義士 紀念碑(해강 이겸호 의사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