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화개리 20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兵將 淸軒 申運錫公 殉國紀念碑(의병장 청헌 신운석공 순국기념비)
옛 말씀에 효우가 지극하고서야 충성할 수가 있다고 하였더니 충효를 실천하여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칭도되는 이가 바로 의병장 청헌 신운석 선생이시다. 공은 1839년 기해 6월 19일 영덕읍 삼근리서 직의 맏아들로 태어나시니 관은 평산 장절공 숭겸의 후예시다. 어려서부터 담략이 과인하고 기품이 넘치더니 병기놀이와 병서일기를 좋아했더라. 때에 나라의 우수가 쇠함인지 일제의 거짓 조약에 의해 우리 주권이 도적질 당하게 되자 방방곡곡에서 국권회복운동이 불길 번지듯 일어났었다. 1896년 안동의병에 비롯되여 청송 영양 영덕에 이르자 향천에 의하여 공이 지역의 의병장에 추대되자 병의○를 모집하여 일사보국할 것을 맹세하였더라. 마침내 남쪽에서 왜병이 침입함을 듣고 나아가 남정면 부경동에서 교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견딜 수 없어 퇴진하여
지품면 속곡에 이르러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 기회를 도모할 즈음에 한 첩자의 밀고에 의하여 왜병들의 습격을 받아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그런데도 삼종질인 신태홍씨가 공과 비슷한 용모라서 혐의를 입어 신안까지 연행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께서 대경실색하시고 스스로 나아가 내가 의병장이라 밝히고 태홍씨를 석방시켰다. 북송정에 이르러서 장차 왜놈의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혹시라도 입을 열어 동지들에게 피해를 끼칠가바 염려한 나머지 공은 혀를 깨물어 문초에 불응할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예측대로 청심 왜분파소에 와서 취조를 받는데 함분유혈을 품으며 시종 불굴하다가 총살되니 동년 병신 8월 초3일이라. 나이가 58세였다. ○라 안동향교의 각지 향유들의 만계와 창의한 동고록이 있었더니 6.25때 소실되여 그 활동한 바를 소상히 밝힐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향내 고로들의 목격한 바와 그 구전의 신 ○로서 도리켜보건대 당시 사림들의 의병활동이란 공명을 도모한 것이 아니였다. 어찌 증빙 문건을 온전히 보전할 수가 있었으랴. 오직 아름다운 이야기로 이어지면 족한 것이었다. 영덕 향유들이 공의 지절을 밝혀서 한 조각 돌을 세우고저 함은 뒷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감탄할 뿐만 아니라 의를 깨우쳐 충과 효를 본받게 함이더라. 아울러 이 고장의 고족인 방도원씨의 특지와 향유 제씨의 협조로 전교 김우영씨가 앞장서 주시한 것을 알겠다.
효는 행실의 근본이요 충은 나라 사랑의 실천이라. 공은 조상을 빛나게 하고 이 고장을 명예롭게 하였도다. 그것을 밝혀 한 조각 돌에 새기니 사람들이 충효를 거울로 삼으리라.
1979년 을미 3월 1일 부산대학교 교수 진성 이동영 짓고 족 후손 정기 쓰고
의병장 청헌 신운석공 순국기념비 건립위원회 세움
효는 행실의 근본이요 충은 나라 사랑의 실천이라. 공은 조상을 빛나게 하고 이 고장을 명예롭게 하였도다. 그것을 밝혀 한 조각 돌에 새기니 사람들이 충효를 거울로 삼으리라.
1979년 을미 3월 1일 부산대학교 교수 진성 이동영 짓고 족 후손 정기 쓰고
의병장 청헌 신운석공 순국기념비 건립위원회 세움
고문 문태준 박순태 김중권 김인환 권혁동 이규영 정기모
위원장 김우영
부위원장 방도원 최중현 유기철 신병룡 신용득
위원 신신휴 신수원 김병선 우원형 최병옥 박종대 윤병문 김병을 김두석 최삼일 김일규 이기양 윤재홍 김영권 김도수 장우석 김효규 김영석 신종근 신영길 유수용 신홍기 유기용 이성락 신홍기 배종호 장지술 신홍섭 최윤기 이재달 이동현 신병호 김옥헌 김영락 남병두 김두호 남명조 남삼조
위원장 김우영
부위원장 방도원 최중현 유기철 신병룡 신용득
위원 신신휴 신수원 김병선 우원형 최병옥 박종대 윤병문 김병을 김두석 최삼일 김일규 이기양 윤재홍 김영권 김도수 장우석 김효규 김영석 신종근 신영길 유수용 신홍기 유기용 이성락 신홍기 배종호 장지술 신홍섭 최윤기 이재달 이동현 신병호 김옥헌 김영락 남병두 김두호 남명조 남삼조
경북 영덕군 영덕읍 화개리 208-1 영덕보건소 옆 항일독립운동가 청헌 신운석 장군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抗日 義兵將 申運錫 將軍 殉國紀念碑(항일 의병장 신운석 장군 순국기념비)
청일전쟁후(1894~1895) 일본의 국권침탈 야욕이 날로 드러나 결국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이어져 이에 전국각지에서 국권회복 항쟁이 일어날 때 우리 영덕 지역에서도 항일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분이 계셨으니 바로 신운석 의병장이시다.
장군은 1839년 영덕읍 화개 2리(三近里:삼근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응천(應天)이요, 호는 청헌(淸軒)이며 평산인(平山大)으로서 고려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의 후예이다.
공(公)은 1896년 초 병신창의시(丙申倡義時) 영덕의진(義陣)의 의병장에 추대되어 남정면 부경리에서 진을 치고 음력 3월 13일 적을 맞아 항전분투하였으나 패퇴하여 영덕읍 남천숲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 후 적의 파상공세를 영덕의병들의 불굴의 기상으로 물리치자 기세가 꺾인 적은 주춤하여 전세는 당분간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이즈음 음력 5월 24일 경기도 이천에서 봉기한 김하락 의진(義陣)과 청송의진(義陣)의 지원으로 연합진을 치고 있던 중 음력 6월 3일부터 6월 4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남천숲 전투에서 아군은 결사항전하여 첫날 적을 크게 물리쳤으나 다음날 수백명의 적 증원군이 들이닥쳐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김하락 의병장이 전사하는 등 패배하였다.
신운석 장군도 후일을 도모코자 지품면 속곡리에 피신하여 있던 중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혀를 깨물어 항거하다가 1896년 음력 8월 3일 총살당하였다.
이와 같은 신장군의 장열한 순국정신을 높이 받들어 1979년 3월 1일 영덕향교가 중심이 되어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현 영덕군보건소 옆에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도 신장군의 항일구국정신을 기리어 2005년 8월 15일 광복 60년 뜻깊은 해를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청일전쟁후(1894~1895) 일본의 국권침탈 야욕이 날로 드러나 결국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이어져 이에 전국각지에서 국권회복 항쟁이 일어날 때 우리 영덕 지역에서도 항일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분이 계셨으니 바로 신운석 의병장이시다.
장군은 1839년 영덕읍 화개 2리(三近里:삼근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응천(應天)이요, 호는 청헌(淸軒)이며 평산인(平山大)으로서 고려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의 후예이다.
공(公)은 1896년 초 병신창의시(丙申倡義時) 영덕의진(義陣)의 의병장에 추대되어 남정면 부경리에서 진을 치고 음력 3월 13일 적을 맞아 항전분투하였으나 패퇴하여 영덕읍 남천숲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 후 적의 파상공세를 영덕의병들의 불굴의 기상으로 물리치자 기세가 꺾인 적은 주춤하여 전세는 당분간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이즈음 음력 5월 24일 경기도 이천에서 봉기한 김하락 의진(義陣)과 청송의진(義陣)의 지원으로 연합진을 치고 있던 중 음력 6월 3일부터 6월 4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남천숲 전투에서 아군은 결사항전하여 첫날 적을 크게 물리쳤으나 다음날 수백명의 적 증원군이 들이닥쳐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김하락 의병장이 전사하는 등 패배하였다.
신운석 장군도 후일을 도모코자 지품면 속곡리에 피신하여 있던 중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혀를 깨물어 항거하다가 1896년 음력 8월 3일 총살당하였다.
이와 같은 신장군의 장열한 순국정신을 높이 받들어 1979년 3월 1일 영덕향교가 중심이 되어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현 영덕군보건소 옆에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도 신장군의 항일구국정신을 기리어 2005년 8월 15일 광복 60년 뜻깊은 해를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義兵將 淸軒 申運錫公 殉國紀念碑(의병장 청헌 신운석공 순국기념비)